보편적 복지를 향한 여정

(이글은 웹진 <제3시대> 73호에 올린 글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수많은 미국인들은 열광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교황의 미국방문 중 언론의 가장 큰 주목을 받았던 것은 바로 연방의회와 유엔에서의 연설이다. 교황의 중심 메시지는 다름 아닌 보편적 복지였다. 이를 위해서 법을 만드는 의회나 법을 집행하는 행정부 모두가 힘을 합쳐 공동이익과 결속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보편적 복지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지나친 이분법적 접근, 즉 선과 악 또는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는 분리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분리주의가 이웃과의 담을 만들고 인종차별을 정당화하고 미국의 이민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황은 미국이 우리가 아닌 그들이란 말을 사용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경종을 울린다. 교황은 모두를 우리로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우리 안에 진정 보편적 복지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우리 삶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미국인들이 반드시 들어야 할 복음이었다.

성서학자 월트 브루거만도 자신의 책 『보편적 복지를 향한 여정』(Journey to the Common Good)에서 교황과 같은 주장을 한다. 미국은 시간이 갈수록 빈부격차가 더욱 심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오바마 미 대통령은 빈부격차를 현재 미국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까지 이야기 했다(Pew Research Center). 한국도 빈부격차가 더욱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고 비정규직이 전체 근로자의 3분의 1을 넘어서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는 영구 빈곤층이 늘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브루거만은 구약성서의 출애굽기와 예언서 예레미야와 이사야를 통해서 본 보편적 복지의 개념을 오늘날 우리 시대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해답으로 내놓고 있다.

브루거만은 자신의 책 1장에서 출애굽기의 보편적 복지를 향한 여정을 언급하고 있다. 출애굽기의 중심 주제는 단순히 노예에서의 해방이 아니라 보편적 복지를 향한 기나긴 여정의 출발로 볼 수 있다. 브루거만은 애굽 왕 바로를 보편적 복지를 향한 여정에서 가장 큰 걸림돌로 묘사하고 있다. 바로가 지배하는 애굽 제국은 당시 고대근동의 최대의 곡창지대였다. 창세기와 출애굽기는 바로가 요셉과 부와 자본을 독점하는 방식을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기근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요셉에게 와서 돈으로 곡식을 사는 경제행위를 한다. 결국 애굽과 가나안 땅의 모든 돈이 요셉에게로 몰렸고 요셉은 벌어들인 돈을 바로의 궁으로 보낸다(창세기 47:14). 사람들은 양식과 교환할 돈이 다 떨어지자 집에서 기르는 짐승들을 요셉에게로 끌고 온다(창세기 47:17). 양식과 바꿀 집짐승도 다 떨어지자 사람들은 양식을 얻기 위해 자신들의 몸과 밭을 요셉에게 판다(창세기 47:19). 칼 막스의 이론에 의하면 애굽 제국의 생산수단(means of production)이 바로에 의해 독점 지배되고 있는 구조다. 결국 밭에서 생산된 것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바치는 애굽 제국의 토지법이 만들어지게 된다(창세기 47:26). 브루거만은 애굽 제국의 노예제도는 소수권력 계층의 교묘한 조작으로 인한 부와 재산의 독점을 상징한다고 주장한다. 출애굽은 단순한 노예에서의 해방이 아니라 애굽 제국의 독점경제에서 광야의 보편적 복지를 향한 대탈출인 것이다.

브루거만은 애굽 제국의 독점경제의 시작을 바로가 꾼 악몽에서 보고 있다. 바로의 꿈과 대조적으로 모세는 보편적 복지를 향한 희망의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이다. 출애굽 한 히브리인들이 보편적 복지의 삶을 처음으로 배운 곳이 바로 광야다. 하늘에서 비처럼 내리는 만나는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애굽 제국의 피라미드식 생산경제 체제와 구별된다. 첫째, 만나는 일용할 양식으로서(출 16:4), 자신에게 필요한 양만큼 만 거두어 양식을 불의하게 축적하는 애굽 제국의 독점 경제체제와 다르다(출 16:16). 둘째, 만나를 거두는 행위는 애굽 제국의 노예제를 통한 착취된 노동이 아니라 자발적 노동이다(출 16:16). 셋째, 만나를 통해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불안과 걱정으로 고통 받는 애굽의 삶과 달리 결핍 속에서도 풍성한 나눔과 감사가 넘치는 아름다운 광야의 삶을 엿볼 수 있다(출 16:18).

브루거만은 시내산의 십계명 중 안식일 준수계명은 단순히 예배가 아니라 애굽 제국의 시스템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고 더 나아가 끊임없는 소유와 부를 추구하는 물질 만능주의 삶으로부터 해방하는 의미라고 주장한다. 애굽 제국의 경제는 끊임없는 노예의 노동으로 굴러가는 사회로서 히브리 노예는 쉼 없는 노동으로 착취당했던 것이다.

마가복음 6장의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장면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보편적 복지가 실현되는 방식을 예수께서 직접 보여주고 있다. 브루거만은 광야의 만나와 예수의 오병이어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 복지는 오늘날 독점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보편적 복지로 나아가는 길을 보여주는 하늘의 메시지라고 주장한다.

브루거만은 광야 시내산의 핵심인 보편적 복지사회의 메시지가 예언자들에게 이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브루거만은 자신의 책 2장에서 예레미야의 보편적 복지를 향한 예언자적 외침을 언급하고 있다. 브루거만은 예레미야가 다윗과 솔로몬 왕국의 종교적, 도덕적, 경제적 악행을 고발하고 있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예레미야는 다윗왕조의 악행의 최고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솔로몬의 통치를 강하게 비판한다(예레미야 9:23-24). 이어서 브루거만은 솔로몬 왕조의 번영과 부귀를 미국의 부귀영화에 비교한다. 예레미야는 솔로몬의 종교적, 도덕적, 경제적 악행을 하나님의 사랑, 정의, 공의로 맞서고 있다. 브루거만은 이 세 가지 요소는 보편적 복지사회로 나아가는 가장 중요한 하늘의 메시지라고 주장한다.

브루거만은 자신의 책 3장에서 이사야의 메시지를 통해 보편적 복지를 주장한다. 이사야서의 중심 메시지 중 하나는(특히 제 3 이사야- 이사야 56-66) 바로 포로 귀환 공동체의 재건을 위한 새로운 질서 확립이다. 브루거만은 새로운 공동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보편적 복지라는 것이다. 특별히 이사야 65장은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을 언급하며 브루거만은 이사야의 비전은 다름 아닌 보편적 복지의 비전이라고 역설한다.

이 책은 브루거만이 2008년 10월 레젠트 컬러지에서 강의 한 내용을 토대로 2009년 1월에 출판사와 출판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바로 그때 미국은 경제위기를 맞이하였다. 브루거만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가장 큰 문제가 바로 보편적 복지의 상실이라고 단정한다. 그는 구약성서의 출애굽기, 예레미야, 이사야가 꿈꾸었던 새 하늘과 새 땅을 통해 오늘날 우리들이 독점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보편적 복지라는 새로운 사회를 꿈꾸고 만들어 나가야한다고 경고한다. 보편적 복지가 실현된 사회를 하나님 나라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지만, 나누고 섬기는 삶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 나가는 하나의 거룩한 노력임에 틀림없다.

사라가 본 이스마엘의 행동 (창세기 21장 9절)

창세기 21장은 이스마엘의 행동에 위협을 느낀 사라가 아브라함을 부추겨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스마엘의 어떠한 행동이 사라를 위협했던 것일까? 아래는 창세기 21장 9절의 히브리어 본문과 영어/한글 번역이다:

ותרא שׂרה את־בן־הגר המצרית אשׁר־ילדה לאברהם מצחק

  • KJV: And Sarah saw the son of Hagar the Egyptian, which she had born unto Abraham, mocking.
  • NRSV: But Sarah saw the son of Hagar the Egyptian, whom she had borne to Abraham, playing with her son Isaac.
  • 개역성경: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 표준새번역: 그런데 사라가 보니 이집트 여인 하갈과 아브라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이삭을 놀리고 있었다.
  • 공동번역: 그런데 사라는 이집트 여자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아준 아들이 자기 아들 이사악과 함께 노는 것을 보고.

위의 번역에서 보듯이 KJV 성경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하다”라고 번역한 반면, NRSV는 단순히 “이스마엘이 이삭과 함께 놀다”라고 번역한다. 개역성경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다”라고 번역하였고 표준새번역은 “이삭을 놀리고 있다”고 번역한 반면, 공동번역은 이스마엘이 “이사악과 함께 놀다”라고 번역한다. 과연 어떤 번역이 옳은가?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은 단순히 “이스마엘이 놀고 있다”라고 기록한다. 그러나 KJV와 개역성경의 번역처럼 전통적인 해석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한 것으로 번역한다. 아마도 이는 이스마엘이 이삭을 “박해하였다”고 해석한 바울의 견해에 기초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갈라디어서 4장 29절). 그러나 창세기 21장 9절의 문맥에서 볼 때 이스마엘의 행동은 “조롱”의 의미로 이해 될 수 없다 (Westermann, Genesis 12-36, 339).

문제는 본문에 사용된 히브리어 피엘형 분사 מצחק (metsakheq, 메차헥)의 해석에 달려있다. 이 단어는 동사 צָחַק (tsakhaq, 차학크, “웃다”)에서 온 것으로 피엘형은 단순히 “웃다”는 뜻이 아니라 “즐기다” 혹은 “놀이를 하다”로 번역될 수 있다. 만일 “조롱하다”라는 의미로 해석이 될려면 이 단어 앞에 히브리어 전치사 ב (be)가 필요한데, 본문은 이 전치사 없이 피엘형 분사만 존재한다. 따라서 히브리어 본문의 문맥상 이스마엘의 행동이 이삭을 조롱한 것은 아니다.

칠십인역과 불가타역은 “בנה את־יצחק” ([이스마엘이] “자신의 아들 이삭과 함께”) 라는 내용을 첨가함으로써 이스마엘이 혼자가 아니라 이삭에게 혹은 이사고가 함께 무엇인가를 했다는 의미를 분명히 한다.

같은 형태의 피엘형 분사 (מצחק , metsakheq, 메차헥)가 창세기 26장 8절에 나오는데 여기서는 이 단어가 부부관계의 육체적 접촉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이삭이 그의 아내 리브가를 껴안을 것을 블레셋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보았다.” 이 구절에 사용된 것처럼 피엘형 분사의 의미가 성적접촉을 의미한다면, 이스마엘이 이삭에 대한 동성애적 사랑을 표현한 의미가 된다 (David J. Zucker, “What Sarah Saw: Evnisioning Genesis 21:9-10, The Jewish Bible Quarterly [36/1], 2008: 54-62).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미드라쉬 문헌에도 전혀 언급하지도 않고 창세기 21장의 문맥에서 볼 때 하나의 추측에 불과하다.

창세기 16장 16절에 의하면 지금 이스마엘의 나이는 적어도 15세로서 어린 동생 이삭을 즐겁게 해 주는 행위 이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왜 사라가 이스마엘의 행동이 위협적이었는지는 본문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 (Speiser, Genesis, 155).

이스마엘이 이삭보다 15살 정도 나이 많은 형이라면 이스마엘이 이삭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사라에게 큰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사라는 하갈과 그녀의 아들 이스마엘을 “여종”과 “여종의 아들”이라고 명명함으로써 그들을 철저히 “타자화” (the Other) 한다. 더 나아가 사라는 “종의 아들은 내아들 이삭과 함께 상속자가 될수 없다” (10절)라고 단언한다. 사라는 자신의 아들이 “타자” (여기서는 이집트인)의 문화와 종교의 영향을 받을까 두려워한 했을수도 있다 (S. J. Teubal, Sarah the Priestess: The First Matriarch of Genesis [Athens: Swallow/Ohio University, 1984], 40).

타자와 타자의 문화에 대한 두려움과 부정적인 창세기 저자의 입장은 에서가 헷 족속 이방연인과 혼인하여 이삭과 리브가를 근심하였다고 기록한 부분에서도 잘 드러난다 (창세기 26장 34-35). 사라는 결국 이스마엘을 이삭에게서 떠어놓는 결정을 하고 아브라함도 그녀의 제안에 동의한다 (하나님도 이 제안에 동의한다: 창세기 21장 12절).

전통적인 랍비문헌인 미드라쉬(Midrash)나 토셉타(Tosefta)는 이스마엘을 우상숭배, 강간, 유혹, 살인을 일삼는 건달로 묘사한다 (Midrash Genesis Rabbah 53.11). 이는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국가 사이의 긴장을 반영한 랍비문헌의 창세기 21장에 대한 정치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사라는 이스마엘이 이삭과 함께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판단하였고, 이런 이유로 하갈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집에 쫓겨난다. 그렇다면 타자와 공존할 수 없다는 본문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나님은 이스마엘에게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창세기 21장 13절) 이스라마엘 울부짓음을 들이시고 큰민족을 이루게 하신다는 (창세기 21장 18절) 약속을 하시지만, 여전히 타자와 함께 공종할 수 없다는 아브라함 가정이야기는 성서를 읽는 우리들에게 더많은 질문을 하게 한다.

바벨탑 이야기 (창세기 11장 1-9절): 심판인가? 축복인가?

창세기 11장 1-9절의 바벨탑 이야기는 고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야기되는 성서에서 가장 흥미있는 이야기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표준새번역은 본문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1. 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
  2. 사람들이 동쪽에서 이동하여 오다가, 시날 땅 한 들판에 이르러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3.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서, 단단히 구워내자.”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썼다.
  4.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을 쌓고서,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5. 주께서는, 사람들이 짓고 있는 도시와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
  6. 주께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만일 사람들이 같은 말을 쓰는 한 백성으로서, 이렇게 이런 일을 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제 그들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하는 말을 뒤섞어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8. 주께서 거기에서 그들을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9. 주께서 거기에서 온 세상의 말을 뒤섞으셨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 곳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한다. 주께서 거기에서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  [저자강조]

혹자는 바벨탑 이야기가 실제 역사적인 사건을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1999년 웨인 젝슨 (Wayne Jackson) 은 Christian Courier 블라그에  “The Tower of Babel-Legend or History?” 라는 글을 올렸다. 이 글에서 젝슨은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입증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젝슨의 글은 한동대학교 창조과학 연구소에 의해 “바벨탑: 전설인가, 역사인가?” 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바벨탑 이야기가 역사적인지 신화인지는 하는 논쟁보다 더욱 중요한 이슈는 “바벨탑 이야기가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다. 바벨탑 이야기는 다음의 세가지 방향으로 해석되어 왔다. 아래의 내용은 시카고 멕코믹 신학교에서 구약을 가르치는 테드 히버트 (T. Hiebert) 의 최근 논문 “바벨탑과 세계문화의 기원” (“The Tower of Bable and the Origin of the World’s Cultures,” JBL 126/1 [2007]: 29-58) 에 근거했음을 알린다.

첫째, 바벨탑은 “인간의 교만과 하나님의 심판” 의 이야기다. 최초의 창세기 주석서로 불리는 주전 2세기 유대교 문서 쥬빌리서는 (The Book of Jubilee) 바벨탑 이야기의 주제를 “인간의 교만과 하나님의 심판” 으로 이해하였다 (Jubilees 10:22). 기독교인 어거스틴도 (Augustine, City of God, Book 16, Chapter 10) 바벨탑을 “인간의 교만이 하늘에 닿는 탑을 쌓는 행위” 라고 해석하였다. 16세기 종교개혁자 칼빈과 (Commentaries on the First Book of Moses Called Genesis, vol. 1) 루터도 (Luther’s Works, vol. 2, Lectures on Genesis: Chapters 6-14) 바벨탑 이야기를 “인간의 교만과 하나님의 심판” 이라는 차원에서 창세기 주석을 하였다. 20세기의 위대한 두 구약학자 게르하르드 폰 라트와 (Genesis, 153) 클라우스 웨스트만도 (Genesis 1-11, 548-49) 역시 바벨탑은 인간의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이야기로 읽고 있다. 그러나 바벨탑 이야기의 본문인 창세기 11장 1-9절은 “인간의 교만” 를 전혀 찾을수가 없다.

둘째, 바벨탑은 “제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이야기다. 크로에오토와 (J. S. Croatto, “A Reading of the Story of the Tower of Babel from a Perspective of Non-Identity,” In Teaching the Bible: The Discourses and Politics of Biblical Pedagogy [1993]: 203-23) 데나 놀란 페웰은 (Danna Nolan Fewell, “Building Babel,” In Postmodern Interpretation of the Bible – a Reader [2001]: 1-15) 약자를 억압하는 제국의 지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로서 바벨탑 이야기를 읽고 있다. 바벨탑 이야기에 나오는 “바벨” 이라는 단어는 바벨론 제국을 지칭하는 것으로, 주전 8세기는 앗시리아 제국의 지배 아래서, 그리고 6세기는 바벨론 제국의 지배 아래서 끊임없이 침략당하고 노략당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관점에서 제국을 심판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읽고 있다. 바벨탑이 바벨론의 아카드어의 BAB.ILUM 은 “신의 문” 이라는 뜻이고, 히브리어의 Balal 은 “혼동 혹은 혼합하다” 라는 뜻이다. 따라서 어떤 학자들은 바벨탑이 바벨론의 지구렛 (Ziggurat) 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구렛은 바벨론의 신 마르둑에게 헌정한 신전이므로 창세기의 바벨탑과는 관계가 없다.  

셋째, 바벨탑 이야기는 “다양한 문화와 언어의 기원” 에 대한 이야기다. 번하드 엔드슨과 (Bernhard W. Anderson, “The Tower of Babel: Unity and Diversity in God’s Creation,” In From Creation to New Creation: Old Testament Perspective [ 1994]: 165-78) 테드 히버트는 (T. Hiebert, “The Tower of Bable and the Origin of the World’s Cultures,” JBL 126/1 [2007]: 29-58) 바벨탑 이야기의 주제는 “인간의 교만과 하나님의 심판” 이라는 구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 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바벨탑 이야기는 “다양한 문화” 의 성서적 기원을 보여주는 것으로 다양한 문화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 이라는 맥락에서 해석하고 있다. 바벨탑 이야기는 “주께서 거기에서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 (창세기 11장 9절b, 표준새번역) 라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끝난다고 주장한다. 문화와 언어의 다양함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해석은 새롭다. 히버트는 바벨탑 이야기에서 인간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 사이의 갈등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래의 도표를 참조하라: 

  

divine-plan1

 

히버트의 주장에 의하면, 바벨탑 이야기는 “한 언어”를 사용하고 “한 문화”를 고집하는 인간과 “다양한 언어”와 “다양한 문화”를 배푸시는 하나님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이 갈등의 해결을 심판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축복으로 볼 것인가? 히버트의 바벨탑 해석은 창세기 1-11장을 하나님의 “창조”와 “심판”으로 읽어오는 전통적인 창세기 주석에 문제를 제기한다 (히버트는 2008년 한 강의에서 이러한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히버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심판은 창세기 9장에서 끝난다고 한다. 창세기 1-9장을 편집한(?) 저자 (아마도 P) 에 따르면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 라고 명령하시는 창세기 1장 28절과 9장 1절의 말씀이 창세기 10장에 실현되었기에 (노아의 자손의 족보) 바벨탑 이야기 (창세기 11장) 는 저주와 심판이 아니라, 세상 온 지면에 흩어져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축복” 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바벨탑 이야기는 “제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이야기로 해석하는 두번째 견해에 동의한다. 히버트에 의하면, 이 의견도 여전히 “인간의 교만과 하나님의 심판” 이라는 구도에 속한다. 필자는 위의 표준새번역 번역에 “도시,” “탑,” “시날 땅,” 그리고 “온 땅”에 빨간색으로 강조를 하였다. 즉 바벨탑 이야기의 중심주제는 한 특정한 지역에 인간이 세우는 거대한 도시와 탑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가장 중심된 구절은 8절이다: “주께서 거기에서 그들을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시날 땅 [제국의 지배] 에서 온 땅으로 [피지배] 사람들을 흩어신 하나님의 역사 [심판] 으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바벨탑 이야기는 시날 땅 [제국] 에서 가나안으로 [온 땅] 이주한 아브람의 이주를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