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1장은 이스마엘의 행동에 위협을 느낀 사라가 아브라함을 부추겨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스마엘의 어떠한 행동이 사라를 위협했던 것일까? 아래는 창세기 21장 9절의 히브리어 본문과 영어/한글 번역이다:
ותרא שׂרה את־בן־הגר המצרית אשׁר־ילדה לאברהם מצחק
- KJV: And Sarah saw the son of Hagar the Egyptian, which she had born unto Abraham, mocking.
- NRSV: But Sarah saw the son of Hagar the Egyptian, whom she had borne to Abraham, playing with her son Isaac.
- 개역성경: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 표준새번역: 그런데 사라가 보니 이집트 여인 하갈과 아브라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이삭을 놀리고 있었다.
- 공동번역: 그런데 사라는 이집트 여자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아준 아들이 자기 아들 이사악과 함께 노는 것을 보고.
위의 번역에서 보듯이 KJV 성경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하다”라고 번역한 반면, NRSV는 단순히 “이스마엘이 이삭과 함께 놀다”라고 번역한다. 개역성경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다”라고 번역하였고 표준새번역은 “이삭을 놀리고 있다”고 번역한 반면, 공동번역은 이스마엘이 “이사악과 함께 놀다”라고 번역한다. 과연 어떤 번역이 옳은가?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은 단순히 “이스마엘이 놀고 있다”라고 기록한다. 그러나 KJV와 개역성경의 번역처럼 전통적인 해석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한 것으로 번역한다. 아마도 이는 이스마엘이 이삭을 “박해하였다”고 해석한 바울의 견해에 기초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갈라디어서 4장 29절). 그러나 창세기 21장 9절의 문맥에서 볼 때 이스마엘의 행동은 “조롱”의 의미로 이해 될 수 없다 (Westermann, Genesis 12-36, 339).
문제는 본문에 사용된 히브리어 피엘형 분사 מצחק (metsakheq, 메차헥)의 해석에 달려있다. 이 단어는 동사 צָחַק (tsakhaq, 차학크, “웃다”)에서 온 것으로 피엘형은 단순히 “웃다”는 뜻이 아니라 “즐기다” 혹은 “놀이를 하다”로 번역될 수 있다. 만일 “조롱하다”라는 의미로 해석이 될려면 이 단어 앞에 히브리어 전치사 ב (be)가 필요한데, 본문은 이 전치사 없이 피엘형 분사만 존재한다. 따라서 히브리어 본문의 문맥상 이스마엘의 행동이 이삭을 조롱한 것은 아니다.
칠십인역과 불가타역은 “בנה את־יצחק” ([이스마엘이] “자신의 아들 이삭과 함께”) 라는 내용을 첨가함으로써 이스마엘이 혼자가 아니라 이삭에게 혹은 이사고가 함께 무엇인가를 했다는 의미를 분명히 한다.
같은 형태의 피엘형 분사 (מצחק , metsakheq, 메차헥)가 창세기 26장 8절에 나오는데 여기서는 이 단어가 부부관계의 육체적 접촉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이삭이 그의 아내 리브가를 껴안을 것을 블레셋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보았다.” 이 구절에 사용된 것처럼 피엘형 분사의 의미가 성적접촉을 의미한다면, 이스마엘이 이삭에 대한 동성애적 사랑을 표현한 의미가 된다 (David J. Zucker, “What Sarah Saw: Evnisioning Genesis 21:9-10, The Jewish Bible Quarterly [36/1], 2008: 54-62).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미드라쉬 문헌에도 전혀 언급하지도 않고 창세기 21장의 문맥에서 볼 때 하나의 추측에 불과하다.
창세기 16장 16절에 의하면 지금 이스마엘의 나이는 적어도 15세로서 어린 동생 이삭을 즐겁게 해 주는 행위 이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왜 사라가 이스마엘의 행동이 위협적이었는지는 본문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 (Speiser, Genesis, 155).
이스마엘이 이삭보다 15살 정도 나이 많은 형이라면 이스마엘이 이삭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사라에게 큰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사라는 하갈과 그녀의 아들 이스마엘을 “여종”과 “여종의 아들”이라고 명명함으로써 그들을 철저히 “타자화” (the Other) 한다. 더 나아가 사라는 “종의 아들은 내아들 이삭과 함께 상속자가 될수 없다” (10절)라고 단언한다. 사라는 자신의 아들이 “타자” (여기서는 이집트인)의 문화와 종교의 영향을 받을까 두려워한 했을수도 있다 (S. J. Teubal, Sarah the Priestess: The First Matriarch of Genesis [Athens: Swallow/Ohio University, 1984], 40).
타자와 타자의 문화에 대한 두려움과 부정적인 창세기 저자의 입장은 에서가 헷 족속 이방연인과 혼인하여 이삭과 리브가를 근심하였다고 기록한 부분에서도 잘 드러난다 (창세기 26장 34-35). 사라는 결국 이스마엘을 이삭에게서 떠어놓는 결정을 하고 아브라함도 그녀의 제안에 동의한다 (하나님도 이 제안에 동의한다: 창세기 21장 12절).
전통적인 랍비문헌인 미드라쉬(Midrash)나 토셉타(Tosefta)는 이스마엘을 우상숭배, 강간, 유혹, 살인을 일삼는 건달로 묘사한다 (Midrash Genesis Rabbah 53.11). 이는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국가 사이의 긴장을 반영한 랍비문헌의 창세기 21장에 대한 정치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사라는 이스마엘이 이삭과 함께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판단하였고, 이런 이유로 하갈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집에 쫓겨난다. 그렇다면 타자와 공존할 수 없다는 본문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나님은 이스마엘에게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창세기 21장 13절) 이스라마엘 울부짓음을 들이시고 큰민족을 이루게 하신다는 (창세기 21장 18절) 약속을 하시지만, 여전히 타자와 함께 공종할 수 없다는 아브라함 가정이야기는 성서를 읽는 우리들에게 더많은 질문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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