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2회 시카고 성서연구학회

제352회 시카고 성서연구학회 모임 (Chicago Society of Biblical Research) 이 오늘 우리학교 Lutheran School of Theology at Chicago 에서 열렸다. 특별히 오늘 모임은 신약성서학 갈리디아서 수사학의 대가인 Hans Dieter Betz 의 학문을 기념하고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열렸다. 현재 시카고 지역에서 가르치고 계시는 Betz 교수님의 제자 두분이 Betz 교수님을 기념하는 찬사의 글을 올렸다: Clare K. Rothschild and Margaret M. Mitchell.

Meeting of Chicago Society of Biblical Research

세분의 학자가 논문을 발표하였다. 아래는 논문 요약문이다:

1. Revisiting the Judicial Species of Rhetoric for Galatians by Troy Martin (Xavier University)

 The primary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valuate an old suggestion by Cornelius a Lapide and Heinrich August Schott about the syntax of Galatians 1:6-7 that supports Hans Dieter Betz’s association of Galatians with forensic rhetoric. Rather than connecting εἰ μή in verse 7 to the preceding relative clauses as do all other commentators, they connect these two words to Θαυμάζω in verse 6. According to them, εἰ μή introduces a protasis for an apodosis that begins with Θαυμάζω. The resulting syntax indicates that Paul adopts the rehtorical strategy of “shifting of blame” in this attempt to persuade the Galatians to return to his gospel. Since shifting of blame is a recognized strategy in forensic rhetoric, their explanation of the syntax of Galatians 1:6-7 makes this part of the forensic species of rhetoric useful for understanding one aspect of Paul’s rhetorical strategy in Galatians.

2. The Depictions of Paul and Other Jews as Present and Former Persecutors in the Acts of the Apostles by James Kelhoffer (St. Louis University)

This paper examines persecution as a basis for legitimacy in the Acts of the Apostles. In particular it considers Luke’s negative depictions of Jews as persecutors and Luke’s characterization of Paul as the persecuted former persecutor.

3. The Cultic Status of the Levites in the Tmeple Scroll: Between hermenutics and History by Jeffrey Stackert (University of Chicago)

The complex views of Levitical cultic status in the Pentateuch continued to develop in Second Temple Jewish Literature. In several texts (e.g., Chronicles, the Testament of Levi, Aramaic Levi, Jubilees), the status of the Levites vis-à-vis the priests changes and even improves relative to their rank in pentateuchal Priestly literature. Perhaps no Second Temple text, however, is more noteworthy on the question of the relative status of priests and Levites than the Temple Scroll. By both mediating between biblical Priestly and Deuteronomic perspectives and innovating beyond them, this text introduces cultic privileges for the Levites unattested in other Second Temple literature. In this paper, I will attempt to explain the Temple Scroll authors’ exegetical engagement with their biblical sources as a basis for their novel presentation of Levitical cultuc rights. I will also consider the historical conditions that facilitate the legal innovations that the Temple Scroll introduces with regard to Levitical cultic status

코덱스 사이나이티크스 (Codex Sinaiticus) 학회

코덱스 사이나이크스

코덱스 사이나이티크스

가장 오래된 (4세기) 신약성서 사본인 코덱스 사이나이티크스 (Codex Sinaiticus) 에 대한 학회가 영국 박물관에서 2009년 7월 6-7일 사이에 열린다.

이 코덱스는 칠십인역 연구에도 상당히 중요하다. 이 코덱스의 칠십인역은 히브리 성서가 포함하지 않는 외경문서인 제2에스드라서 (2 Esdras), 토빗서 (Tobit), 쥬딧서 (Judith), 마카비 1서와 4서 (1 & 4 Maccabees), 그리고 지혜와 벤시락 (Wisdom and Sirach) 을 포함하고 있는 본문비평에 아주 중요한 코덱스다. 

코덱스 사이나이티쿠스 프로젝트 (The Codex Sinaiticus Project) 는 이 코덱스 전체를 디지탈 포멧으로 재 통합하는 작업 중이며, 이번 학회는 이 작업을 축하하는 학술학회로 모이게 된다. 이번 학회에 본문비평과 사해문서의 권위자인 임마누엘 토브 (Emanuel Tov)도 여러 강연자 중의 한분으로 참석한다. 자세한 사항은 Codex Sinaiticus Conference 를 참조하라. 특히 이 웹페이지는 현재까지 디지탈로 출판한 코덱스의 페이지를 제공하고 있다.

히브리어 성서 (BHS) 읽기 안내

히브리어 문법을 공부한 많은 사람들이 히브리어 성서(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BHS, 1977)를 읽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 이유는 히브리 성서(BHS)가 레닌그라드 코덱스(Leningrad Codex)에 기초한 본문 외에 맛소라 표기와 본문비평에 사용된 복잡한 기호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글은 (1) 히브리어 성서의 페이지 구성, (2) 맛소라 표기, 그리고 (3) 본문비평에 사용되는 기호를 설명함으로써 히브리어 성서를 읽고자 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자 한다. 이글은 엘리스 브론츠(Ellis R. Brotzman)의 『구약성서 본문비평 입문』(Old Testament Textual Criticism A Practical Introduction, 1994)과 폴 웨그너(Paul D. Wegner)의 『성서 본문비평』(Textual Criticism of the Bible, 2006)을 요약/정리한 것이다.

1. 페이지 구성

첫째, 히브리 성서(BHS)의 페이지 구성에 대해 살펴보자. 아래의 이미지는 히브리 성서(BHS)의 민수기 12:4-13:3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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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 히브리 성서 상단에 책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는데, 짝수 페이지 번호는 히브리어로, 홀수 페이지 번호는 라틴어로 각각 책의 제목이 기재되어 있다.
  • B: 히브리어 자음 ס(싸멕)은 패러그래프를 닫는다는 표시다.
  • C: 15번째와 19번째줄의 히브리어 자음 פ(페)는 패러그래프를 시작한다는 표시다. 고대문서에서는 새로운 줄이 여기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D: 오른쪽 여백은 맛소라 파르바다(Masorah parva; samll Masorah).
  • E: 히브리어 본문 바로 아래에 맛소라 매그나(Masorah magna; large Masorah)가 위치해 있다. 여기의 맛소라 매그나는 Cp12로 시작하는데, 그뜻은 민수기 12장에 대한 맛소라 매그나를 기입하였음을 의미한다.  
  • F: 맛소라 매그나 밑에 본문비평에 사용된 기호들을 포함한 본문비평 기호들이다. 본문비평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에세이 구약성서 본문비평을 참조하라.
  • G: 왼쪽 밑부분 여백에 히브리어 자음 ס(사멕)은 예전에 사용된 토라의 분할을 표시하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유대인은 토라를 167 부분으로 분할하였고, 바벨론 유대인은 54부분으로 분할하였다. 히브리어 자음 ס(사멕) 밑에 히브리어 פרשׁ 는 페라샤(Parashah, 주간 분할된 토라)가 이부분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지시하고 있다. 이 표시는 주간에 읽을 성서일과와 같은 것으로, 이 표시에 따라 매주 히브리 성서를 읽으면 1년에 토라를 다 읽게 된다.

2. 맛소라 표기

둘째, 맛소라 표기에 대해 살펴보자. 아래의 이미지는 히브리 성서(BHS)의 출애굽기 32:16-30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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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소라 표기에서 다음 두가지가 가장 중요하다: 케팁-케레(Kethiv-Qere)와 헤팩스 레고메논(hapax legomenon). 맛소라 표기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다음 두책을 참고하라: Reinhard Wonneberger, Understanding BHS: A Manual for the Users of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trans. Dwight R. Daniels, 2d ed. [Rome: Pontifical Biblical Institute Press, 1990]와 William R. Scott, A Simplified Guide to BHS [Berkeley: BIBAL, 1987]).

  • B: 위 예제 페이지의 오른쪽 여백 전체가 맛소라 파르바다. 모음이 없는 히브리어/아람어로 표시되어 있어 초보자가 이해하기에 쉽지 않다.
  • C: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맛소라 파르바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케팁-케레(Kethiv-Qere)다. C박스 안의 ק(콥프)는 아람어 분사 קְרֵא (Qere, “what is read”)로서 “읽혀진” 이라는 뜻이다 . 즉 본문에 적혀있는 히브리어 읽기를 전통에 따라 맛소라가 교정한 것이다. 읽기를 교정해야 할 단어는 같은 줄의 히브리어/아람어 단어 위에 조그만 점을 쳐서 표시하였다. 이경우에는 맛소라 파르바가  מִיָּדָו  로 적혀있지만, מידיו로 읽어야 한다고 표시하였다. 대부분의 케팁-케레는 히브리어나 아람어의 다양한 철자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24절: 맛소라 파르바의 또다른 중요한 것은 헤팩스 레고메논(hapax legomenon)다. 위의  예제 페이지의 경우 24절 끝에 맛소라가 히브리어 자음 ל 위에 작음 점이 찍어서 표시하였고, 해당 단어 위에 작음 점이 찍어 표시하였다. 즉 두 단어는 히브리어 성서에서 이 구절에만 나온다는 뜻이다.    

3. 본문비평에 사용되는 기호

세째, 히브리어 성서(BHS)에 포함된 본문비평에 대해 살펴보자. 히브리어 성서 아랫부분에 본문비평시 사용되는 기호들을 보여준다. 히브리 성서(BHS)의 기초가 된 코덱 레닌그라덴시스가 아니라 다른 고대사본이나 번역본에서 다른 본문읽기를 할 경우 본문비평한다. 즉 다른 사본이나 번역본에서 삭제되었거나 첨가된 본문읽기를 비교/대조한 본문비평의 실예를 보여주고 있다. 본문비평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에세이 구약성서 본문비평을 참조하라. 아래의 이미지는 히브리 성서(BHS)의 창세기 1장 부분이다. sample-page-genesis

본문 비평란의 Cp는 해당 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위의 경우 Cp. 1,1은 창세기 1장 1절에 대한 본문비평 기호임을 지시한다. 위의 예제는 창세기 1장 7절이다. 

  • “7a-a”: 본문비평을 하고자 하는 부분의 시작과 끝을 의미한다.
  • Cf 6a: 6절과 비교하라는 뜻이다.
  • ins: 편집자는 7절의 a-a부분에 6절과 비교하여 וירא אלהים כי־טוב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라는 절을 첨가할 것을 제안한다.
  • cf: 4절, 10절, 12절, 18절, 21절, 31절과 비교하라.
  • et: “그리고” 라는 뜻으로 칠십인역의 8절을 참조하라는 뜻이다.

본문비평을 하기 위해서는 위의 예제와 같이 비평에 사용된 기호들과 사본/번역본 생략어를 알아야 한다. 비평에 사용된 언어와 기호, 그리고 사본 생략어를 통틀어 textual apparatus라고 한다. 혹자는 textual appratus를 본문 비평장치라고 한국어로 번역하는데, 이는 적절한 표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본문비평이 기구나 장비를 사용하는 어떤 기술이 아니기 때문에 본문 비평장치라는 한글번역은 부적절하다. 따라서 필자는 본문 비평장치라는 한글번역 대신 본문 비평기호라고 부른다. 본문비평에 사용된 사본/번역본의 생략어는 다음과 같다:

  

히브리 성서(BHS)의 머리말과 본문비평에 사용된 기호는 한동구 교수에 의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비블리아 헤브라이카 슈투트가르텐시아」의 서문. BHQ는 민영진 교수에 의해 번역된 BHQ의 서문, 부호와 약자, 용어 정의와 해설 번역(대한성서공회의 성경원문 연구)을 참고하라.

히브리어 성서(BHS) 읽기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아래의 책들을 참고하라.

  1. Albright, William F. “New Light on Early Recensions of the Hebrew Bible.” BASOR 140 (1955): 27-33.
  2. Barr, James. “A New Look at Kethibh-Qere.” OTS 21 (1981): 19-37.
  3. Blau, Ludwig. “The Extraordinary Points in the Pentateuch.” JQR 19 (1907): 411-19.
  4. Cross, Frank M. “The Contributions of the Qumran Discoveries to the Study of the Biblical Text.” IEJ 16 (1966): 81-95. Reprinted in QHBT. See pp. 278-92.
  5.            . “The Evolution of a Theory of Local Texts.” In QHBT. See pp. 306-20.
  6. Dotan, Aron. “Massorah.” EJ 16:1401-82.
  7. Freedman, David N. “The Massoretic Text and the Qumran Scrolls: A Study in Orthography.” Textus 2 (1962): 87-102. Reprinted in QHBT. See pp. 196-211.
  8. Ginsburg, Christian D. Introduction to the Massoretico-Critical Edition of the Hebrew Bible. Repr. New York: KTAV, 1966. See pp. 9-107, 183-96, 308-67.
  9. Sperber, Alexander. “Problems of the Masora.” HUCA 17 (1942-43): 293-394.
  10. Talmon, Shemaryahu. “Aspects of the Textual Transmission of the Bible in the Light of the Qumran Manuscripts.” Textus 4 (1964): 95-132. Reprinted in QHBT. See pp. 226-63.
  11. Tov, Emanuel. “A Modern Textual Outlook Based on the Qumran Scrolls.” HUCA 53 (1982): 11-27.
  12. Waltke, Bruce K. “The Textual Criticism of the Old Testament.” In Biblical Criticism: Historical, Literary, and Textual, edited by Roland K. Harrison et al. Grand Rapids: Zondervan, 1978. See pp. 47-65.
  13. Wonneberger, Reinhard. Understanding BHS: A Manual for the Users of the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Rome: Biblical Institute Press, 1984. See esp. pp. 61-73.
  14. Würthwein, Ernst. The Text of the Old Testament: An Introduction to the Biblia Hebraica, translated by Erroll F. Rhodes. Grand Rapids: Eerdmans, 1979. See esp. pp. 17-20.

시편 41편 3절

 יְהוָה יִסְעָדֶנּוּ עַל־עֶרֶשׂ דְּוָי כָּל־מִשְׁכָּבוֹ הָפַכְתָּ בְחָלְיוֹ׃

 NRSV: The LORD sustains them on their sickbed; in their illness you heal all their infirmities.

 개역개정: 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을 고쳐 주시나이다.

표준새번역: 주께서는, 그가 어떤 에 걸리든지 붙들어 주시니, 어떤 병상이라도 떨치고 일어난다.

공동번역: 병상에서 그를 붙들어주시리니 자리를 떨쳐 일어나게 되리라.

시편 41편 3절은 “병자의 침대”(דוי ערש)라는 단어와 ”[병자가] 눕는 침상”(משכבו)이라는 단어가 각각 앞절과 뒷절에서 아름다운 대구를 이루고 있는 평행시다. 

위의 번역에서 보듯이 영문번역 NRSV와 두 한글번역서는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히브리시의 평행구조를 잘 드러내고 있는 반면, 공동번역은 [병자가] 눕는 침상 혹은 병상을 “자리”라는 단어로 번역하고 있다. 비록 공동번역의 번역이 표면적으로 대구법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오히려 다른 한글번역보다 더욱 시다운 번역을 하고 있다. 즉 독자는 이미 “자리”라는 한글단어가 ”병상”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병상”이라고 단어를 단순 반복하는 것보다 “자리”라는 새로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더욱 시다운 이미지를 살린 좋은 번역일 수도 있다.

앞절과 뒷절의 동사시제도 흥미롭다. 앞절의 시제는 미완료 시제다(Imperfect/prefix): “주님이 붙들어 주신다”(יסעדנו). 그리고 뒷절은 완료형 시제다(perfect/affix): ”당신께서 완전히 고쳐 주신다” (הפכת). 앞절의 미완료형 동사는 종종 3인칭 명령형으로(jussive) 이해될 수 있지만, 뒤절의 시제에 맞추어 완료형으로 해석하는게 더 적절하다. 뒤절의 완료형은 어떤 병이라도 고쳐주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앞절의 동사의 형태가 조금 이상하다. 동사 끝부분에 히브리어 자음 하나가 삽입되었다: “눈” (Nun, נ). 따라서 동사의 형태는 다음과 같다: יסעדנו. 이런 현상을 문법적으로 어중 문자삽입 (energic or epenthetic [inserted] Nun)이라고 부른다. 이는 아랍어의 영향으로 문법적으로 아무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단지 발음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 (Joüon §61, [A Grammar of Biblical Hebrew]).

시편연구의 권위자 모빙켈은 시편 41편의 장르를 ”개인 탄원시”(individual lament)로서 ”병상에서 읇는 시”(a pslm of illness)로 정의하였다(Mowinckel, The Psalms in Israel’s Worship, II, 1-9). 그러나 병상에서 읇는 탄원시라는 모빙켈의 정의는 문자적이다. 시편 41편 3절은 1절과 3절의 문맥에서 이해해야 한다(시편 41:1-3). 1-3절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이해하고 돌보는 사람은 어떤 재앙이나 병중에도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말하면, “행복” 또는 “회복”은 가난하고 약한 사람을 돌보는데서 온다는 심오한 진리를 말하고 있다 (제임스 림브거 [James Limburg], Psalms, 137). 시편 41편은 영광의 찬양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주님, 찬양을 받으십시오. 영원에서 영원까지. 아멘. 아멘,” 시편 41:13) 시편의 다섯책 중 첫번째 책을 끝맺는 마지막 시다. 첫번째 책의 시작은 ”복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으로 시작하여 (시편 1편), “복있는 사람은 가난하고 약한 (과부나 고아) 사람을 돕는 사람으로 모든 시련과 병사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으로 끝맺는다 (시편 41편).

민중과 과정: 민중신학과 과정신학의 대화

민중신학자 김희헌(Hiheon Kim)에 의해 민중신학에 대한 새 책이 (영문) 출판되었습니다: Minjung and Process: Minjung Theology in a Dialogue with Process Thought [민중과 과정: 민중신학과 과정신학의 대화], New York: Peter Lang Publishing Group, 2009). 출판사가 소개하는 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This book reconstructs the legacy of Korean minjung theology by reformulating its essential ideas in a dialogue with process thought. In a minimal sense, this study is a theological reinterpretation of the doctrine of the minjung messiah, an idea which historically suffered from a misunderstanding that minjung theology created a ‘messianic confusion’ while replacing christology and soteriology by a radical anthropology. This erroneous conception occurred when the idea was placed within the philosophically dualistic framework of traditional doctrines in which the work of minjung is totally separated from the work of Christ. In order to avoid such a dualistic understanding, the author critically adopts process panentheism and makes minjung ideas more communicable and more comprehensive in current theological, religious, and philosophical debates. Beyond defending the idea of the minjung messiah, he also argues for an inclusive minjung hermeneutics that promotes the fundamental insight of minjung theology, in philosophical clarity. Through minjung hermeneutics, minjung theology expands its practical concern and overcomes the theoretical nihilism in postmodern studies.

책을 읽어 보지 않아서 책의 주제와 내용을 알수 없지만, 위의 내용에 따르면, 이책은 민중 메시아론을 과정철학/신학과의 대화로 재 구성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기독론과 구원론이 인간론으로 대치된 민중신학의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이러한 민중신학의 문제점은 “민중의 역할” (the work of minjung )과 “그리스도의 역할” (the work of Christ)을 철저히 구분하는 철학적 이분법에 기초하였다고 주장합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저자는 과정철학/신학의 방법론으로 민중 메시아론을 다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 책은 또 다른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민중신학이 “포괄적 민중해석학” (inclusive minjung hermeneutics)으로 포스트모던 허무주의를 극복하여 민중신학의 근본적인 통찰력을 더욱 증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민중신학의 핵심은 “민중 메시아론” 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민중신학자들의 민중 메시아론은 대체로 명확하지 않거나 또는 이론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이책은 민중신학의 민중 메시아론의 문제점을 과정신학의 해석적 틀 안에서 해결하고자 하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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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Table of Contents 

구약성서 본문비평

어떤 보수적 성향의 성서학자들은 (근본주의자) 본문비평을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모독하는 학문이라고 비난하는 반면, 어떤 진보적 성서학자들은 본문비평을 보수적인 성향의 단순한(?) 비평학이라고 단정짓는다. 그러나 이들의 견해는 본문비평의 목적을 잘못 이해한 결과에서 초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본문비평은 성서의 오류를 전제하지도 않을 뿐더러, 더구나 단순한 학문이라고 단정지을 만큼 허술하지도 않다. 본문비평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정이 없이는 불가능한 신앙적 학문이다. 본문비평은 대단히 복잡하고 어려운 작업이지만, 본문비평의 목적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본문 읽기/해석의 어려움” 을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본문비평에서 말하는 본문해석의 어려움을 성서학자 제임스 바는 (James Barr, Comprarative Philology and the Text of Old Testament)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성서를 해석할 때 종종 우리는 해석과 번역의 곤란함을 (difficulty) 당면하게 된다. 문법이 틀리거나 이상한 단어가 사용된 경우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리고 어떤 사본은 다른 사본과 다르게 본문을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비평은 사본들을 단순히 비교하는 비평 방법론도 아니고, 더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조각조각 쪼개는 성서에 대한 모독 행위도 아니다. 보수적 성향의 학자이든 진보적 성향의 학자이든 모든 성서학자는 성서라는 문서 (text)를 읽고 해석하는 학자로서 자신만의 본문읽기가 요구된다. 나는 본문비평의 시작을 여기에서 출발하고자 한다. 성서학자들이 성서의 언어인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를 공부하는 목적도 여기에 있다. 진보든 보수든 모든 성서학자들은 성서의 원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모두가 솔직하다. 즉 본문비평은 한마디로 말하면, 성서의 사본들을 대조하는 중노동이다. 따라서 본문비평은 성서학자나 일반 대중에게도 결코 쉽게 다가오지 않는 힘들고 지루한 학문(작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비평은 성서를 해석하는 모든 사람 (학자든 일반인이든) 에게 반드시 필요한 학문임에 틀림없다 (성서언어를 모르는 일반인들을 위해서 성서학자들의 본문비평은 학자로서 사명이다). 필자는 이글에서 다음의 세가지 질문으로 본문비평을 설명하고자 한다: (1) 본문비평은 왜 필요한가? (본문비평의 목적); (2) 본문비평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본문비평 방법); 그리고 (3) 본문비평은 어떻게 적용되는가? (본문비평 실예).

1. 본문비평의 목적

본문비평은 왜 필요한가? 우리말 본문비평은 영어의 Textual Criticism 을 번역한 것인데, 사실 Textual Criticism 은 본문비평 이라는 말보다 ”사본비평” 이라는 의미가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본문비평은 여러 사본을 비교하여 가장 “적절한 본문읽기”를 (reliable wording of a text) 선택하기 때문이다. 피터 멕카트는 (P. Kyle McCarter) 본문비평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본문읽기를 결정” (to determine the most reliable wording of a text)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Textual Criticism: Recovering the Text of the Hebrew Bible, [Philadelphia: Fortress, 1986], 18). “적절한 본문읽기의 선택”과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본문읽기 결정”이라는 명제는 히브리 성경의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히브리어 구약성서 BHK (1937), BHS (1977),  그리고 BHQ (Richard Wesi의 글 Biblia Hebraica Quinta and the Making of Critical Editions of the Hebrew Bible, 2010년에 구약성서 전체에 대한 BHQ 가 출판될 예정)는 중세기 히브리어 사본중 하나인 레니그라드 코덱스 (Leningrad Codex, 1009 년) 에 기초한 것이지 히브리어 원문에 기초한 것은 아니다. 즉 본문비평은 지금 우리가 읽는 히브리어는 하나의 (복)사본이므로 복사할 때 오류나 실수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전제한다. 그러나 본문비평의 목적이 원본에 가장 가까운 본문읽기의 재건만은 아니다. 위의 서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본문을 읽을때 만나게 되는 “본문 해석의 어려움” (이 어려움은 히브리어 단어를 모르거나 문법을 몰라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라 현재 히브리어 본문이 가지고 있는 오류 때문이다) 때문에 여러 사본들을 비교하여 가장 적절한 본문읽기를 하고자 하는데 있다. 성서학자들이 주장하는 본문비평의 목적은 대략 다음과 같은 세가지 차원에서 정리될 수 있다.

(1) 본문의 마지막 형태의 복원: 이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학자는  엘리스 브로츠만과 (Ellis R. Brotzman, Old Testament Textual Criticism: A Practical Introduction [Grand Rapids: Baker, 1994], 124) 이다. 브로츠만에 의하면, 본문비평의 목적은 편집자가 본문의 실제언어 (ipsissima verba) 를 마지막으로 편집한 형태를 복원하는데 있다.

(2) 정경화된 문서복원: 이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학자는 제임스 앤더스와 (James Sanders) 브리바드 차일즈 (Brevard Childs) 등이 있다. 이들은 본문비평의 목적은 특정한 종교에 의해 받아들여진 정경의 형태의 복원에 있다. 예를들면, 칠십인역은 다이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위한 성경이므로 칠십인역이 히브리 원본에 첨가를 했든 삭제를 했든 칠십인역 자체의 메시지를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3) 여러 복사본의 적절한 본문읽기의 복원: 이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학자는 유진 울리치다 (Eugene Ulrich). 울리치에 따르면, 본문비평의 목적은 맛소라 전승의 복원이 아니라, 칠십인역, 맛소라 문서, 사해문서, 사마리아 오경등 다양한 사본의 본문읽기를 복원하는 것이다. 즉 본문의 다양한 읽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울리치의 설명처럼, 필자도 본문비평의 목적은 원본의 복원이 아니라 다양한 문서 즉, 맛소라 문서, 칠십인역, 사해문서, 사마리아 오경을 비교/분석하여 가장 “적절한 본문읽기”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위의 세가지 목적에 대해 자세한 사항은 부르스 봘트케 (Bruce K. Waltke) 의 “구약성서 본문비평의 목적” (“Aims of OT Textual Criticism.”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51.1 [1989]. [Reproduced by permission]).

2. 본문비평의 방법

본문비평은 어떻게 하는가? 본문비평의 목적이 마지막 형태의 복원이든지, 정경화된 문서의 복원이든지, 여러 복사본의 적절한 본문 읽기의 복원이든지, 성서 본문의 “적절한 읽기”를 결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본문비평은 대략 다음과 같은 절차를 밟는다.

첫째, 히브리어 사본을 읽을 때 본문의 (맛소라 사본) 문제점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구약성서 본문을 읽어가면서 종종 해석의 문제나 문법의 문제와 같은 어려움에 당면하게 된다. 사본은 원본이 아니라 복사본이기에 필사자가 오류가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히브리 성경도 여러 사본 중의 하나이기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 필자는 사본의 오류를 이야기하지 하나님 말씀의 오류를 말하고 있는것은 아니다. 사본의 오류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비슷한 자음의 혼동 (Confusion of Similar Letters): 가장 대표적인 오류중의 하나로서 필사자가 비슷한 히브리어 단어를 혼동하여 필사한 경우를 말한다. 혼동하기 쉬운 히브리어/아람어 자음은 다음과 같다. בד (창세기 9장 7절), ב and ר (열왕기하 22장 32절), יצ (이사야 11장 15절), משׁ (민수기 24장 9절), א 과  ד (역다하 22장 10절)

(2) 글자 생략/단축 (Abbreviations): 필사자가 긴 글자를 단축하여 생기는 오류를 말한다. 종종 필사자들은 하나님의 이름  יהוה  (아도나이)를 י 나 또는 ה 로 단축하여 필사한다. 또 다른 예로 히브리어 전치사 עד (“unto”) 는 때때로 על־דבר (“because of”)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여호수아 17장 14절). 필사자의 글자단축은 문맥상의 혼동을 가져올 수 있다.

(3) 비슷한 문장의 끝부분 띄어넘기 (Homoeoteleuton). 비슷한 문장의 끝부분 띄어넘어 한 문장 전체를 생략하는 것은 필사자가 범하는 가장 흔한 오류다. 문장이 비슷한 단어나 구로 끝날 경우 필사자가 다음 문장으로 띄어 넘어 한 문장이 완전히 삭제되는 경우를 말한다. 필사자가 오랫동안 복사를 하다보면 눈의 피로를 느낀다. 이런 경우에 종종 이와같은 오류가 발생한다 (레위기 4장 25절).

(4) 중자탈락 (Haplography). 이 오류는 필사자가 tagmeme 을 tagme로 쓰는 것처럼 두번 나오는 문자를 탈락시키는 오류다 (신명기 20장 6-7절).

(5) 중복오사 (Dttography). 이 경우는 literature 를 literarature 로 오사하는 오류다. 우리말의 경우로 예를 들면, “바람”을 “바바람” 으로 자음을 두번 쓰는 경우를 말한다.  열왕기하 15장 16절은 기이한 형태의 히브리어를 소개하는데 이는 중복오사의 오류로 보인다:  הֶהָרֹותֶיהָ (명사, “아이 밴 부녀”) 에 앞의 정관사 ה 는 아마도 중복오사의 오류에서 생긴 문법적 오류인 것 같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문법적으로 명사 뒤에 접미사가 올 경우 명사 앞에 접두사로 오지 않는다.

이러한 단순한 오류 외에도 필사자의 신학적 의도에 따라서 사본은 원본과 다르게 수정/첨가/삭제되기도 하였다. 사본의 문제점을 발견한 이후에는 다른 사본과 비교해야 한다. 

둘째, 여러 고대사본이나 번역본을 맛소라 사본과 대조/비교한다. 중세기의 히브리어 사본을 비교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중세기의 다른사본을 직접 보고 비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중세기의 다른 사본들과 맛소라 사본을 비교하기 위해서 많은 비용을 들여 유럽과 미국의 각 지역 도서관을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 히브리어 성서 (BHS ) 하단에 위치한 본문비평란에 성서학자들이 이미 맛소라 사본과 다른 중세기 히브리어 사본을 비교/분석하였다. 따라서 맛소라 사본과 중세기 히브리어 사본의 비교는 그들의 분석에 의존하면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본다.

본문 비평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번역본은 칠십인역이다. 칠십인역은 맛소라 사본보다 400년 혹은 그 이전의 번역본이다. 사해문서가 발견되지 이전에 칠십인역은 맛소라 사본과 대조 분석하여 본문 읽기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가장 권위 있는 번역본이다. 칠십인역과 본문비평에 대한 자세한 다음의 웹자료를 참조하라 (Centre for Septuagint Studies and Textual Criticism).

 
칠십인역 파피루스

칠십인역 파피루스

불가타역은 제롬의 라틴어 번역본으로 4세기경 히브리어 원본에 기초한 번역본으로 알려진 또 하나의 권위 있는 번역본이다. 맛소라 사본의 모세오경은 종종 사마리아 오경과 비교/대조하여 본문 읽기의 문제점을 해결한다. 끝으로, 1946년 사해문서가 발견되면서 본문비평학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사해문서는 가장 오래된 히브리어 사본으로서 에스더서를 제외한 구약성서의 모든 책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구약성서 본문비평에서 사해문서는 가장 중요한 사본이라고 할 수 있다. 

 
맥카터 (McCarter)나 그외 여러 본문비평 학자들은 는 히브리어 사본과 번역본을 비교한 뒤, “가장 읽기 어려운” (lectio difficilior) 그리고 “가장 짧은 본문” (lectio brevior)이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고 결정하는 것이 본문비평의 목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본문비평의 목적이 단순히 원본의 복원만은 아니다. 더구나 원본의 복원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오히려 본문비평에서 히브리어 사본이나 번역본 비교를 통해 가장 “적절한 본문읽기”를 결정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폴 베그너는 (Paul Wegner) 히브리어 사본과 번역본을 비교할 때, 가장 “적절한 본문읽기”를 위해 다음과 같은 기준을 제시한다 (Textual Criticism of the Bible):
 
  • 대부분의 다른 본문이 제공하는 읽기를 결정 (Determine the reading that would most likely give rise to the other readings)
  • 사본의 가치를 평가 (Carefully evaluate the weight of the manuscript evidence)
  • 사본의 읽기가 2차적인 첨가 혹은 해석인지 결정 (Determine if the reading is a secondary reading or a gloss)
  • 문맥의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읽기 결정 (Determine which reading is most appropriate in its context)

아래 베그너의 도표는 사본과 번역본이 히브리어 원문과의 관계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도와준다:

 

original-text

 

3. 본문비평의 실예

 

본문비평은 어떻게 적용되는가? 앞에서 설명한 본문비평의 목적과 방법론에 기초하여 창세기 4장 8절에 대한 본문비평을 해보자. 

 

창세기 4장 8절

 

위의 도표에서 보듯이, 개역성경과 표준새번역은 창세기 4장 8절은 서로 다르다. 표준새번역은 개역성경에 나오지 않는 “우리 들로 나가자!” 라는 문장을 첨가하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 두 한글성경은 다른 번역을 하고 있는가? 본문비평은 이런 질문에서 출발한다. 한글 번역서들이 서로 다른 고대사본을 참고 했을것으로 가정할 수 있다. 개역성경과 맛소라 사본은 다른 사본과 번역서에 나오는 문장을 생략하는 반면, 표준새번역은 다른 사본과 번역서에 나오는 문장을 첨가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정을 세울수 있다: 개역성경은 맛소라 사본에 기초하여 번역을 하였고, 표준새번역은 다른 사본과 번역서에 기초하여 번역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글성경이 사본을 참고해서 번역했는지 아니면 영어나 중국어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는지에 대한 문제는 따져봐야 한다).

 

이제 사본을 비교해 보자! 맛소라 사본이 보여주는 창세기 4장 8절은 본문의 문맥상 문제가 있다. 가인이 아벨을 쳐 죽였는데, 어떻게 가인과 아벨이 ”들”로 나가게 되었는지 대한 문제는 수수께끼다. 다른 사본과 번역서인 사마리아 오경, 칠십인역, 시리아역, 불가타는 ”우리 들로 나가자!”라는 문장을 첨가함으로서 문맥상에 문제가 없다: 사마리아 오경 ( נלכה השתה ); 칠십인역 (Διέλθωμεν εἰς τὸ πεδίον). 어떤 본문비평 학자들에 따르면, 맛소라 사본이 가장 짧고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가장 원문에 가까운 사본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본대로, 맛소라 사본이 필사시 오류를 범했을 가능성도 있다. 가장 큰 가능성은 “비슷한 문장의 끝부분 띄어넘기 (homoeoteleuton) 이다. 맛소라 사본의 필사자가 원본의 끝부분에 두번 나오는  שדה 중 하나를 건너 띄어 한 줄을 생략 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맛소라 사본이 가장 “적절한 본문읽기”라고 볼 수는 없다. 필자의 생각에는 사마리아 오경, 칠십인역, 시리아역, 불가타가 보여주는 창세기 4장 8절이 원본에도 더 가깝고 또한 더 “적절한 본문읽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래의 도표는 시대별 가장 오래된 사본과 번역본에서 가장 최근의 사본과 번역본을 한눈에 볼 수 있게 정리하였다. 이 도표는 엘리스 브로츠만 (Ellis Brozman)의 책 구약성서 본문비평: 안내 입문서 (Old Testament Textual Criticism: A Practical Introduction, p. 83)에서 가져온 것임을 알린다.

 

구약성서 본문 역사 (사본/번역본/개정본)

구약성서 본문 역사 (사본/번역본/개정본)

 

  1. Klein, Ralph W. Textual Criticism of the Old Testament: The Septuagint after Qumran. Philadelphia: Fortress, 1974.
  2. McCarter, P. Kyle. Textual Criticism: Recovering the Text of the Hebrew Bible. GBS:OTS. Philadelphia: Fortress, 1986.
  3. Roberts, Bleddyn J. The Old Testament Text and Versions. Cardiff: University of Wales Press, 1951.
  4. Waltke, Bruce K. “The Textual Criticism of the Old Testament.” In Biblical Criticism: Historical, Literary, and Textual, pp. 47-65, edited by Roland K. Harrison et al. Grand Rapids: Zondervan, 1978.
  5. Wegner, Paul D.: A Student’s Guide to Textual Criticism of the Bible : Its History, Methods & Results. Downers Grove, Ill. : InterVarsity Press, 2006.

위의 도서자료 중 랄프 클라인 (Ralph Klein) 교수는 저에게 구약성서를 가르쳐 준 선생님이다. 클라인 교수의 책 Textual Criticism of the Old Testament 는 임마누엘출판사에 의해 구약본문비평 (1988년) 이라는 제목으로 김기천씨에 의해 한국어로 번역/출판 되었다. 이 책에서 클라인 교수는 본문비평에 있어서 칠십인역과 2세기 칠십인역 교정본들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클라인 교수는 맛소라 사본이 참고했던 구약원본(?)과 칠십인역이 참고했던 구약원본(?)이 서로 다른 원본이었다고 주장한다. 특별히 본문비평에 있어서 칠십인역에 관심있는 분에게 큰 도움이 되는 책이다.

 

구약본문비평

바벨탑 이야기 (창세기 11장 1-9절): 심판인가? 축복인가?

창세기 11장 1-9절의 바벨탑 이야기는 고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야기되는 성서에서 가장 흥미있는 이야기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표준새번역은 본문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1. 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
  2. 사람들이 동쪽에서 이동하여 오다가, 시날 땅 한 들판에 이르러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3.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서, 단단히 구워내자.”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썼다.
  4.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을 쌓고서,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5. 주께서는, 사람들이 짓고 있는 도시와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
  6. 주께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만일 사람들이 같은 말을 쓰는 한 백성으로서, 이렇게 이런 일을 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제 그들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하는 말을 뒤섞어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8. 주께서 거기에서 그들을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9. 주께서 거기에서 온 세상의 말을 뒤섞으셨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 곳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한다. 주께서 거기에서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  [저자강조]

혹자는 바벨탑 이야기가 실제 역사적인 사건을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1999년 웨인 젝슨 (Wayne Jackson) 은 Christian Courier 블라그에  ”The Tower of Babel-Legend or History?” 라는 글을 올렸다. 이 글에서 젝슨은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입증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젝슨의 글은 한동대학교 창조과학 연구소에 의해 “바벨탑: 전설인가, 역사인가?” 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바벨탑 이야기가 역사적인지 신화인지는 하는 논쟁보다 더욱 중요한 이슈는 “바벨탑 이야기가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다. 바벨탑 이야기는 다음의 세가지 방향으로 해석되어 왔다. 아래의 내용은 시카고 멕코믹 신학교에서 구약을 가르치는 테드 히버트 (T. Hiebert) 의 최근 논문 “바벨탑과 세계문화의 기원” (“The Tower of Bable and the Origin of the World’s Cultures,” JBL 126/1 [2007]: 29-58) 에 근거했음을 알린다.

첫째, 바벨탑은 “인간의 교만과 하나님의 심판” 의 이야기다. 최초의 창세기 주석서로 불리는 주전 2세기 유대교 문서 쥬빌리서는 (The Book of Jubilee) 바벨탑 이야기의 주제를 “인간의 교만과 하나님의 심판” 으로 이해하였다 (Jubilees 10:22). 기독교인 어거스틴도 (Augustine, City of God, Book 16, Chapter 10) 바벨탑을 “인간의 교만이 하늘에 닿는 탑을 쌓는 행위” 라고 해석하였다. 16세기 종교개혁자 칼빈과 (Commentaries on the First Book of Moses Called Genesis, vol. 1) 루터도 (Luther’s Works, vol. 2, Lectures on Genesis: Chapters 6-14) 바벨탑 이야기를 ”인간의 교만과 하나님의 심판” 이라는 차원에서 창세기 주석을 하였다. 20세기의 위대한 두 구약학자 게르하르드 폰 라트와 (Genesis, 153) 클라우스 웨스트만도 (Genesis 1-11, 548-49) 역시 바벨탑은 인간의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이야기로 읽고 있다. 그러나 바벨탑 이야기의 본문인 창세기 11장 1-9절은 “인간의 교만” 를 전혀 찾을수가 없다.

둘째, 바벨탑은 “제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이야기다. 크로에오토와 (J. S. Croatto, “A Reading of the Story of the Tower of Babel from a Perspective of Non-Identity,” In Teaching the Bible: The Discourses and Politics of Biblical Pedagogy [1993]: 203-23) 데나 놀란 페웰은 (Danna Nolan Fewell, “Building Babel,” In Postmodern Interpretation of the Bible - a Reader [2001]: 1-15) 약자를 억압하는 제국의 지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로서 바벨탑 이야기를 읽고 있다. 바벨탑 이야기에 나오는 “바벨” 이라는 단어는 바벨론 제국을 지칭하는 것으로, 주전 8세기는 앗시리아 제국의 지배 아래서, 그리고 6세기는 바벨론 제국의 지배 아래서 끊임없이 침략당하고 노략당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관점에서 제국을 심판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읽고 있다. 바벨탑이 바벨론의 아카드어의 BAB.ILUM 은 “신의 문” 이라는 뜻이고, 히브리어의 Balal 은 “혼동 혹은 혼합하다” 라는 뜻이다. 따라서 어떤 학자들은 바벨탑이 바벨론의 지구렛 (Ziggurat) 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구렛은 바벨론의 신 마르둑에게 헌정한 신전이므로 창세기의 바벨탑과는 관계가 없다.  

셋째, 바벨탑 이야기는 “다양한 문화와 언어의 기원” 에 대한 이야기다. 번하드 엔드슨과 (Bernhard W. Anderson, “The Tower of Babel: Unity and Diversity in God’s Creation,” In From Creation to New Creation: Old Testament Perspective [ 1994]: 165-78) 테드 히버트는 (T. Hiebert, ”The Tower of Bable and the Origin of the World’s Cultures,” JBL 126/1 [2007]: 29-58) 바벨탑 이야기의 주제는 “인간의 교만과 하나님의 심판” 이라는 구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 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바벨탑 이야기는 “다양한 문화” 의 성서적 기원을 보여주는 것으로 다양한 문화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 이라는 맥락에서 해석하고 있다. 바벨탑 이야기는 “주께서 거기에서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 (창세기 11장 9절b, 표준새번역) 라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끝난다고 주장한다. 문화와 언어의 다양함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해석은 새롭다. 히버트는 바벨탑 이야기에서 인간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 사이의 갈등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래의 도표를 참조하라: 

  

divine-plan1

 

히버트의 주장에 의하면, 바벨탑 이야기는 “한 언어”를 사용하고 “한 문화”를 고집하는 인간과 “다양한 언어”와 “다양한 문화”를 배푸시는 하나님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이 갈등의 해결을 심판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축복으로 볼 것인가? 히버트의 바벨탑 해석은 창세기 1-11장을 하나님의 “창조”와 “심판”으로 읽어오는 전통적인 창세기 주석에 문제를 제기한다 (히버트는 2008년 한 강의에서 이러한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히버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심판은 창세기 9장에서 끝난다고 한다. 창세기 1-9장을 편집한(?) 저자 (아마도 P) 에 따르면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 라고 명령하시는 창세기 1장 28절과 9장 1절의 말씀이 창세기 10장에 실현되었기에 (노아의 자손의 족보) 바벨탑 이야기 (창세기 11장) 는 저주와 심판이 아니라, 세상 온 지면에 흩어져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축복” 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바벨탑 이야기는 ”제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이야기로 해석하는 두번째 견해에 동의한다. 히버트에 의하면, 이 의견도 여전히 “인간의 교만과 하나님의 심판” 이라는 구도에 속한다. 필자는 위의 표준새번역 번역에 “도시,” “탑,” “시날 땅,” 그리고 “온 땅”에 빨간색으로 강조를 하였다. 즉 바벨탑 이야기의 중심주제는 한 특정한 지역에 인간이 세우는 거대한 도시와 탑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가장 중심된 구절은 8절이다: “주께서 거기에서 그들을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시날 땅 [제국의 지배] 에서 온 땅으로 [피지배] 사람들을 흩어신 하나님의 역사 [심판] 으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바벨탑 이야기는 시날 땅 [제국] 에서 가나안으로 [온 땅] 이주한 아브람의 이주를 설명하고 있다.

1930년대 독일신학자와 김교신

퍼시픽 루터란 대학의 (Pacific Lutheran University) 역사학 교수 로벗 에릭센 (Robert P. Ericksen) 은 히틀러를 지지한 독일 신학자들 (Theologians Under Hitler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5]) 이라는 책을 1985theologian-under-hitler1년에 출판하였고, 이책은 DVD로도 (2005년) 발매되고 있다. 에릭센은 이책에서 히틀러를 지지한 세명의 독일 신학자를 소개하고 있다: 신약성서 학자 임마누엘 히어쉬 (Emmanuel Hirsch), 게르하르드 키텔 (Gerhard Kittel), 그리고 신학자 폴 알하우스 (Paul Althaus). 알하우스는 히틀러가 독재자로 등극한 1933년 히틀러를 “하나님의 선물” (The gift and miracle of God) 이라고 극찬하였고, 히어쉬는 히틀러를 “신의 축복” (sunrise of divine goodness) 이라고 찬양하였으며, 키텔은 나찌 독재정권으로 하여금 유대인 학살의 도덕적 명분을 제공하였다. 키텔은 유명한 신약성서사전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의 저자이기도 하다.

물론 1930년대 당시 나찌정권에 저항한 독일 고백교회나 (The Confessing Church) 신학자들도 있었다 (D. Bonhoeffer). 그러나 에릭센이 보여주는 것처럼, 1930년대의 대부분의 독일교회와 신학자들의 실망스러운 태도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수 있는가? 불의한 세상의 권력과 폭력에 대하여 교회와 신학자는 어떤 응답을 해야하는가? 히틀러가 독재자로 등극한 1933년 당시 한국의 신학자 김교신은 성서조선 48호 에서 다음과 같은 응답으로 새해를 맞이하였다:

1933년도 또한 암흑이 더욱 심하고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의 횡행함이 극에 달할지 모른다. 그러나 새벽이 캄캄한들 얼마랴. 의의 태양이 떠올라 안개가 지면에서 흩어질 것이 눈앞에 보인다. 살구나무 가지를 바라보던 예레미야와 같이 새해를 맞이하는 아침에 하나님 말씀에 우리의 귀를 기울이자.

김교신은 인간 히틀러를 찬양하는 세명의 독일 신학자와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의의 태양). 내 개인적으로 이런류의 찬양을 “영광의 찬양” (Doxology) 이라고 부른다. 1933년의 한국인들은 일제의 식민지 아래에서 여전히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시기다. 따라서 김교신이 말하는 “암흑”이나 “공중 권세 잡은 자”는 아마도 일본 제국주의를 지칭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김교신과 히틀러를 지지한 세명의 독일 신학자들을 비교하는 것은 그리 적절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김교신은 “공중 권세 잡은 자”에 의해 지배를 당하는 피지배자 이지만, 세명의 독일 신학자는 ”공중 권세 잡은 자”로서 지배자를 대표할 수 있다. 하지만 지배자이건 피지배자이건 신학자로서 시대에 맞게 적절한 하늘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하는 사명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베땅이의 노래 가 소개한 김교신에 대한 동영상을 여기에 올린다.

김교신에 대한 관련된 글은 다음을 참고하라:

베땅이의 노래  김교신

성서와 조선

시편 22편 3절

   וְאַתָּה קָדוֹשׁ יוֹשֵׁב תְּהִלּוֹת יִשְׂרָאֵל׃

 

NRSV: Yet you are holy, enthroned on the praises of Israel.

NET: You are holy; you sit as king receiving the praises of Israel.

개역개정: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표준새번역: 그러나 주님은 거룩하신 분, 이스라엘의 찬양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공동번역: 그러나 당신은 옥좌에 앉으신 거룩하신 분, 이스라엘이 찬양하는 분,

시편 22편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부르짓었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의 기도문으로 유명하다. 따라서 시의 시작부분인 1-2절은 이스라엘의 전형적인 탄식시다. 그러나 3절은 찬양이라는 장르에 해당되는데, 히브리어 동사 ישׁב 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번역상의 문제다. 이 단어는 문법적으로는 능동분사 (active participle) 로서 ”앉아 있는 분” 으로 번역 될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영어성경(NRSV, NET) 은 “왕의 보좌에 앉아 있는 분” 으로 번역하고 있다.

한글성경은 각각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개역개정- “찬송 중에 계시는 주”; 표준새번역- “이스라엘의 찬송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공동번역- “옥좌에 앉으신 거룩하신 분.” 과연 어떤 번역서가 옳은가? 히브리어 동사 “앉다/거주하다” 는 시구에 사용 될 때 은유적인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하나님이 성전의 왕으로서 왕의 보좌에 앉아 계신 이스라엘의 찬양을 받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어 번역 중 공동번역의 “옥좌에 앉으신 거룩한 분” 이 가장 적절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 단어를 성전이라는 공간을 벗어나 세상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찬양으로 이해한다. 즉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권력 위에서 다스리시는 진정한 왕으로서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류의 찬양을 “영광의 찬양” (Doxology) 이라고 부른다.

사해문서와 에세네 종파

지난주 TimeScholar Claims Dead Sea Scrolls ‘Authors’ Never Existed (2009년 3월 16일) 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이글은 이스라엘 신비주의 학자 레이첼 엘리오 (Rachel Elior) 의 최근 에세네 종파와 사해문서와의 관계에 대한 엘리오의 견해를 소개한 것인다. 엘리오는 사해문서의 저자로 알려진 에세파 종파는 요세푸스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의 종파로서 사해문서를 기록/보관한 종파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에세네 종파가 요세푸세에 의해 위조된 종파라는 엘리오의 주장은 새롭기도 하고 더구나 놀랍기도 하다. 이글은 다음의 두가지 측면에서 흥미로운 점이 있다. 첫째, 엘리오가 해석하는 요세푸스의 에네 종파에 대한 해석은 대단히 설득력 있다. 요세푸스가 로마인들에게 유대인들은 로마에 대항하는 집단이 아니라, 고행을 통해 삶의 진리를 찾아가는 사람들임을 알리기 위해 에세네파라는 종파를 만들었다는 엘리오의 주장은 대단히 창조적이다. 그리고 에세네 종파를 소개하는 다른 고대문서들- 플리니와 파일로-은 에세네에 대한 자료를 서로 배겼다는 주장도 대단히 설득력 있다. 그러나 엘리오는 요세푸스가 왜 다른 유대인 종파들-바리새인, 사두개인, 그리고 열심당-을 언급한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고 있지 않다. 둘째, 사해문서의 저자에 대한 오래된 논쟁에 다시금 불을 지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사해문서의 저자인가? 엘리오는 사해문서는 사독의 변절자들에 의해 기록/보존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엘리오의 증거는 무엇인가? 사해문서 중 주전 2세기의 히브리어 문서가 발견되는데 이 문서들은 제사장 전통을 입증하고 있다. 즉 이 문서들은 사독계 변절자들이 사해지역으로 추방당할 때 함께 가지고 온 것이라고 한다. 쿰란공동체가 예루살렘의 사독계 제사장들의 반대자 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해문서의 War Scroll (1QM) 을 보면,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 사이의 갈등이 이러한 사실을 잘 드러낸다. 엘리오의 가설은 노만 고올브 ( Norman Golb) 의 주장과 상당히 비슷하다. 고올브는 1995년  Who Wrote the Dead Sea Scrolls?-The Search for the Secret of Qumran 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고올브는 사해문서는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이 로마에 대항한 유대혁명 기간동안 로마로 부터 문서를 보존하기 위해 사해지역의 동굴에 보관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엘리오의 주장은 고올브의 주장과 다른다. 따라서 사해문서의 저자에 대한 학자들의 논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래의 내용은 나의 영문 Blog (OT Story)의 내용을 한글로 번역한 것임을 알리다 (The Problem for Identifying the Qumran Community as the Essenes).

에세네 종파 가설 (The Essenes Hypothesis)

 에리에eleazar-sukenik1 슈케닉 (Eleazar Sukenik, 1947) 은 사해문서의 저자가 에세네 학파라고 주장한 첫번째 학자다. 슈케닉은 고대 역사가 오세푸스나 파일로의 글에 나오는 유대인 종파인 에세네 종파의 삶과 사해문서를 비교해 본 결과, 사해문서는 에세네  종파의 의해서 기록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다음을 참조하라: Who Wrote the Scrolls?

 
에세네 종파 가설의 문제점 (Problem with the Essenes Hypothesis)
타드 벨 (Todd Beall) 은 27개의 사해문서와 요세푸스가 증언하는 에세네 학파 사이를 비교한 결과, 21 개는 거의 비슷하고 6개는 비슷한 점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따라서 이 6개는 요세푸의 에세네 종파와 사해문서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말하면, 사해문서를 기록한 공동체는 에세네 종파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오세푸스의 에세네 종파와 하해문서의 다른 점은 분명하지 않다. 한 예로, 에세네 공동체를 가입하는 절차를 살펴보자.
josephus-and-manuel-of-discipline1
벤드캄 (VanderKam) 은 요세푸스와 새해문서의 제자 가입 절차 (Manuel of Discipline) 사이에 크게 다른 점이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다른 가설  (Other Theories)
 
사해문서의 저자가 에세네 종파라는 가설 외에 다음의 두가지 가설이 있다. (1) 쿰란 공동체는 사두개인들 이었다. (2) 사해문서를 기록/보존한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해문서는 로마에 예루살렘 사람들로서 자신들의 귀중한 종교문서들을 동굴에 보관한 것들이다. 
 
schiffman_lg첫째, 로렌스 쉬프만 (Lawrence Schiffman) 은 쿰란 공동체는 사두개 종파 였다고 주장한다 (the Qumran-Sadducees hypothesis). 쉬프만는 사해문서의 정화의식의 법 (4QMMT) 이 사두개 종파에 기초한 랍비문서들과 비슷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golbsmall둘째, 로만 골브 (Norman Golb) 는 사해문서는 쿰란공동체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사해문서는 로마에 대항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탈출하여 자신들의 소중한 문서를 동굴에 보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골브는 사해문서가 발견된 동굴과 쿰란공동체가 살았던 거주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