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가 본 이스마엘의 행동 (창세기 21장 9절)

창세기 21장은 이스마엘의 행동에 위협을 느낀 사라가 아브라함을 부추겨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스마엘의 어떠한 행동이 사라를 위협했던 것일까? 아래는 창세기 21장 9절의 히브리어 본문과 영어/한글 번역이다:

ותרא שׂרה את־בן־הגר המצרית אשׁר־ילדה לאברהם מצחק

  • KJV: And Sarah saw the son of Hagar the Egyptian, which she had born unto Abraham, mocking.
  • NRSV: But Sarah saw the son of Hagar the Egyptian, whom she had borne to Abraham, playing with her son Isaac.
  • 개역성경: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 표준새번역: 그런데 사라가 보니 이집트 여인 하갈과 아브라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이삭을 놀리고 있었다.
  • 공동번역: 그런데 사라는 이집트 여자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아준 아들이 자기 아들 이사악과 함께 노는 것을 보고.

위의 번역에서 보듯이 KJV 성경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하다”라고 번역한 반면, NRSV는 단순히 “이스마엘이 이삭과 함께 놀다”라고 번역한다. 개역성경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다”라고 번역하였고 표준새번역은 “이삭을 놀리고 있다”고 번역한 반면, 공동번역은 이스마엘이 “이사악과 함께 놀다”라고 번역한다. 과연 어떤 번역이 옳은가?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은 단순히 “이스마엘이 놀고 있다”라고 기록한다. 그러나 KJV와 개역성경의 번역처럼 전통적인 해석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한 것으로 번역한다. 아마도 이는 이스마엘이 이삭을 “박해하였다”고 해석한 바울의 견해에 기초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갈라디어서 4장 29절). 그러나 창세기 21장 9절의 문맥에서 볼 때 이스마엘의 행동은 “조롱”의 의미로 이해 될 수 없다 (Westermann, Genesis 12-36, 339).

문제는 본문에 사용된 히브리어 피엘형 분사 מצחק (metsakheq, 메차헥)의 해석에 달려있다. 이 단어는 동사 צָחַק (tsakhaq, 차학크, “웃다”)에서 온 것으로 피엘형은 단순히 “웃다”는 뜻이 아니라 “즐기다” 혹은 “놀이를 하다”로 번역될 수 있다. 만일 “조롱하다”라는 의미로 해석이 될려면 이 단어 앞에 히브리어 전치사 ב (be)가 필요한데, 본문은 이 전치사 없이 피엘형 분사만 존재한다. 따라서 히브리어 본문의 문맥상 이스마엘의 행동이 이삭을 조롱한 것은 아니다.

칠십인역과 불가타역은 “בנה את־יצחק” ([이스마엘이] “자신의 아들 이삭과 함께”) 라는 내용을 첨가함으로써 이스마엘이 혼자가 아니라 이삭에게 혹은 이사고가 함께 무엇인가를 했다는 의미를 분명히 한다.

같은 형태의 피엘형 분사 (מצחק , metsakheq, 메차헥)가 창세기 26장 8절에 나오는데 여기서는 이 단어가 부부관계의 육체적 접촉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이삭이 그의 아내 리브가를 껴안을 것을 블레셋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보았다.” 이 구절에 사용된 것처럼 피엘형 분사의 의미가 성적접촉을 의미한다면, 이스마엘이 이삭에 대한 동성애적 사랑을 표현한 의미가 된다 (David J. Zucker, “What Sarah Saw: Evnisioning Genesis 21:9-10, The Jewish Bible Quarterly [36/1], 2008: 54-62).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미드라쉬 문헌에도 전혀 언급하지도 않고 창세기 21장의 문맥에서 볼 때 하나의 추측에 불과하다.

창세기 16장 16절에 의하면 지금 이스마엘의 나이는 적어도 15세로서 어린 동생 이삭을 즐겁게 해 주는 행위 이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왜 사라가 이스마엘의 행동이 위협적이었는지는 본문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 (Speiser, Genesis, 155).

이스마엘이 이삭보다 15살 정도 나이 많은 형이라면 이스마엘이 이삭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사라에게 큰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사라는 하갈과 그녀의 아들 이스마엘을 “여종”과 “여종의 아들”이라고 명명함으로써 그들을 철저히 “타자화” (the Other) 한다. 더 나아가 사라는 “종의 아들은 내아들 이삭과 함께 상속자가 될수 없다” (10절)라고 단언한다. 사라는 자신의 아들이 “타자” (여기서는 이집트인)의 문화와 종교의 영향을 받을까 두려워한 했을수도 있다 (S. J. Teubal, Sarah the Priestess: The First Matriarch of Genesis [Athens: Swallow/Ohio University, 1984], 40).

타자와 타자의 문화에 대한 두려움과 부정적인 창세기 저자의 입장은 에서가 헷 족속 이방연인과 혼인하여 이삭과 리브가를 근심하였다고 기록한 부분에서도 잘 드러난다 (창세기 26장 34-35). 사라는 결국 이스마엘을 이삭에게서 떠어놓는 결정을 하고 아브라함도 그녀의 제안에 동의한다 (하나님도 이 제안에 동의한다: 창세기 21장 12절).

전통적인 랍비문헌인 미드라쉬(Midrash)나 토셉타(Tosefta)는 이스마엘을 우상숭배, 강간, 유혹, 살인을 일삼는 건달로 묘사한다 (Midrash Genesis Rabbah 53.11). 이는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국가 사이의 긴장을 반영한 랍비문헌의 창세기 21장에 대한 정치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사라는 이스마엘이 이삭과 함께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판단하였고, 이런 이유로 하갈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집에 쫓겨난다. 그렇다면 타자와 공존할 수 없다는 본문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나님은 이스마엘에게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창세기 21장 13절) 이스라마엘 울부짓음을 들이시고 큰민족을 이루게 하신다는 (창세기 21장 18절) 약속을 하시지만, 여전히 타자와 함께 공종할 수 없다는 아브라함 가정이야기는 성서를 읽는 우리들에게 더많은 질문을 하게 한다.

소안론 목사(W. L. Swallen)와 평양장로교 선교 종합단지

결혼 후 첫 가족여행을 동부쪽으로 길을 잡았다. 오하이오를 거쳐 뉴저지 그리고 펜실베니아와 메릴랜드를 통과하는 길고 먼 여정이었다. 그중 가장 의미있었던 시간은 메릴랜드 헤이거스 타운에 계시는 최종수 목사님댁 방문이었다. 그곳에서 장로교 선교사 William L. Swallen (한국이름 소안론)목사의 유품을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현재 최종수 목사님이 소장하고 계시는 소안론 목사님의 유품은 18가지다 (유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최목사님의 글 “옛날 창가 ‘식목가’를 다시 부르면서“를 참고하라).

소안론 목사의 유품중 1938년 4월 3일자 평양 산정현교회 주보와 소안론 목사의 설교문 뒷면에 있는 평양 장로교회 선교종합단지 도면이 눈에 들어왔다. 아래 평양 산정현교회 주보는 독립운동가이자 오산학교 교장이었던 조만식 장로의 기도와 소안론 목사의 설교를 기록하고 있다.

평양 산정현교회 주보

소안론 목사는 농과대학 출신으로 미국 북장로교회 소속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소안론 목사의 약력은 조경현의 “순례자 ‘소안론’ 선교사“를 참조하라). 농과대학 출신답게 소안론 목사의 한국선교는 나무사랑과 깊은 관련이 있는것 같다. 최종수 목사님은 소장하고 계신 소안론 선교사님의 유품중 1920년 판 “챵가집”에서 유독 식목가에 큰 관심을 보이고 계신다. 최 목사님은 “옛날 창가 ‘식목가’를 다시 부르면서“라는 제목의 글에서 ”식목가의 가사가 문학적 세련미는 부족하지만 나무심기를 권장하는 실천성이 강하다”고 평가한다.

나무심기와 관련하여 인천제삼교회 원로목사 김광식 목사는 “소안론 선교사의 사과나무“라는 글에서 소안론 목사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소안론 선교사가 안식년 차 미국에 갔다 오면서 사과나무 묘목 300개를 부산 항구에 내렸다. 대구에 있는 선교본부에 묘목 150개를 전달하고 대구근방 기독교인에게 나누어 주어 심게 하였다. 그리고 150개는 평양에 있는 선교본부에 전달하여 평양근처, 주로 황주에 있는 신도들에게 나누어 주고 심게 하였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나라 대구사과와 황주사과의 유래가 되었다. 그후에 우리나라 사과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종류도 개량하여 농산물 소득의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과가 미국 선교사에 의하여 전해진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소안론 목사의 설교문 뒤에 있는 평양 장로교회 종합단지 도면은 더욱 흥미롭다. 이 도면은 병원, 신학교 입학처, 기숙사, 선교사(교수)와 교직원 숙소, 도서관, 평양 외국인 학교, 체육관, 그리고 본관의 위치를 보여주고 있다. 도면을 보면 마포 삼열 선교사는 29번에 거주하셨고 소안론 선교사는 17번에 거주하셨다. 도면을 보아 알수 있듯이, 과히 이곳은 1920년대 한반도에서 가장 화려한 서양식 종합교육시설이었다 (“Pyungyang ‘Jerusalem of the East’” 참조). 흥미로운 사실은 소안론 선교사 개인이 사용하는 편지지 뒷면에 이 도면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편지지 뒷면에 인쇄된 것을 보면, 아마도 선교비를 후원하거나 혹은 한반도 선교와 관련된 사람들에게 평양 장로교회 선교시설을 보여주고자 한 의도가 아니었나 추측된다. 아니면 선교시설이 너무나 크고 복잡하여 이 도면이 지도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평양 장로교회 선교종합단지

창세기 4장 1절: 가인을 창조한 하와?

 וְהָאָדָם יָדַע אֶת־חַוָּה אִשְׁתּוֹ וַתַּהַר וַתֵּלֶד אֶת־קַיִן וַתֹּאמֶר קָנִיתִי אִישׁ אֶת־יְהוָה

  • 개역개정: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 공동번역: 아담이 아내 하와와 한자리에 들었더니 아내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 이렇게 외쳤다. “야훼께서 나에게 아들을 주셨구나!”
  • 표준새번역: 아담이 자기 아내 하와와 동침하니, 아내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았다. 하와가 말하였다. “주의 도우심으로, 내가 남자 아이를 얻었다.”
  • NRSV: Now the man knew his wife Eve, and she conceived and bore Cain, saying, “I have produced a man with the help of the LORD.”
  • NET: Now the man had marital relations with his wife Eve, and she became pregnant and gave birth to Cain. Then she said, “I have created a man just as the LORD did!”

한글번역서는 공통적으로 하와가 “주의 도우심으로 남자아이를 얻었다”고 번역하는 반면, 영어번역서 NRSV는 “생산했다”로, 그리고 NET는 “창조하였다”로 번역하였다. 즉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듯 하와가 가인을 창조하였다는 것이다.

이 구절에 사용된 히브리어 1인칭 동사 קָנִיתִי (qaniti) “내가 얻었다”는 동사원형 קָנָה (qanah)에서 온 것으로 “얻다”라는 뜻이다. 가인(קַיִן, [qayin]) 이라는 이름은 그뜻을 반영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구약성서 전반에 걸쳐 이 קָנָה (qanah)라는 단어가 “창조하다”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창세기 14:9, 22; 출애굽기 15:16; 신명기 32:6; 시편 78:54; 139:13; 잠언 8:22 [지혜의 창조]; 우가릿 문서에서 나오는 동사 qnj [창조하다]를 참조). 칠십인역과 (κτίζω) 시리아역도 본 구절의 (창세기 4:1) 동사를 “창조하다”로 각각 번역하였다.

더 나아가서 이 히브리어 동사가 맛소라 사본 잠언서에서 “얻다”라는 의미로 12번 등장하지만, 칠십인역과 시리아역에서는 “창조”의 개념으로 번역되었다 (Whybray 1965, 504-14). 어원적으로 볼 때, 아랍어에서 가인이라는 뜻은 “짓다, 만들다”로서, “하와가 남자아이를 얻었다”라는 번역보다는 “남자아이를 창조하였다”는 번역이 더 적절하게 보인다. 하지만 맛소라 사본의 창조이야기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이 단어가 창조와 관련되어 결코 사용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앞에서 살펴본 사본대조와 어원적 근거로 ”하와가 하나님처럼 인간을 창조하였다”고 주장한다 (Westermann 1974, 289).   

본 구절과 관련하여 한가지 더 논의할 문법적 내용은אֶת (‘et)다. 히브리어אֶת 은 (1) 목적어를 표기하는 기호와 (2) “함께”라는 뜻의 전치사를 의미한다. 여기에서는 전치사 “함께”로 사용되었다. 어떤 해설자는 이 히브리어 단어를 목적어 표기기호라고 주장함으로써, “내가 남자아이- 하나님을 얻었다 (하나님의 성육신)”라고 이해한다. 이는 하와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메시야라는 창세기 3장 15절의 알레고리적 해석과 연관된다. 그러나 본 구절에서는 전치사 “함께”라는 뜻으로 사용되어 “하나님과 함께” 또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와가 가인을 창조/생산했다는 뜻이 가장 적절하다.   

참고문헌

Irwin, A. 1961. Where Will Wisdom Be Found?. JBL 80 (1961): 133-42. 

Westermann, Claus, 1974. Translated by John J. Scullion S. J. Genesis 1-11: A Commentary. Minneapolis: Augsburg Publishing House. 

Whybray, R. N. 1965. Proverbs 8:22–31 and Its Supposed Prototypes. VT 15: 504-14.

마가복음의 하나님 나라

지난 5월 21일 예수사랑교회에서 열린 시카고 지역 연합감리교 선교부흥회에 참석하였다. 유대인 부자청년의 이야기로 (마가복음 10:17-22) 이승우 목사님이 설교하셨다. 설교의 주제는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달린 것으로 사람의 행위로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이다. 성경 말씀에 기초한 깊이 있는 설교였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 본문으로 설교 할 때 보통 다음과 같은 두가지 차원에서 설교를 한다. 어떤 설교자는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하신 예수의 말씀에 힘입어 부자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설교를 한다. 또는 어떤 설교자는 유대인 부자청년의 질문과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대답을 혼동하여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는 설교를 한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본문의 마지막 말씀을 놓치지 않는 반면, 이승우 목사님도 역시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고 계신다. 과연 그런가? 본문을 먼저 살펴보자.

예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한 사람이 달려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께 물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 너는 계명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아라, 속여서 빼앗지 말아라,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하지 않았느냐? 그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 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산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 제자들은 그의 말씀에 놀랐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하시니, 제자들은 더욱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을 눈여겨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 (표준새번역, 필자강조)

젊은 부자청년의 질문은 도마복음의 시작을 연상케 한다: ”이것들은 살아계신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디디모스 유다 도마가 기록한 비밀어록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어록의 의미와 해석을 발견하는 자는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These are the secret sayings that the living Jesus spoke and Didymos Judas Thomas recorded. And he said, “Whoever discovers the interpretation of these sayings will not taste death.”). 도마복음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따라서 도마복음에서는 영생의 문제에 있어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중요하지 않다. 도마복음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의 어록 (114개의 어록)과 그 어록의 의미를 이해하는 자는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가복음의 부자 청년 유대인 이야기도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어야 된다는 주장은 발견할 수 없다. 영생의 문제로 고민하여 질문한 젊은 부자 유대인에게 예수는 계명 (구약성서의 십계명)을 지켰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예수는 “가진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재산이 많은 부자는 근심하면서 예수를 떠나갔다. 예수는 “재산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본문은 “영생”을 구하는 부자청년의 물음으로 시작하지만, “하나님 나라”로 대답하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결론짓는다. 그럼, 마가복음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과연 무엇인가?

마가복음에서 “하나님의 나라” (ἡ 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 라는 말은 20번 나온다. 

  •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1:15)
  •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맡겨 주셨다. 그러나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로 들린다. (4:11)
  •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고 (4:26)
  •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오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 (9:1)
  •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버려라. 네가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9:47)
  • 그러나 이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노하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10:14)
  •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산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 (10:23)
  •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하시니 (10:24)
  • 예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그 뒤에는 감히 예수께 더 묻는 사람이 없었다. (12:34)
  •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제부터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것을 마실 그 날까지, 나는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다시는 마시지 않을 것이다. (14:25)
  • 그는 명망 있는 의회 의원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대담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청하였다. (15:43)

마가복음은 시작부터 하나님 나라를 언급한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때가 찼다로 표현하고 (1:15);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바깥 사람들에게는 수수께끼이며 (4:11);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오시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 (9:1);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15:43). 이 본문들의 공통점은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들어가는 내세의 세상이 아니라, 이땅에서 살아서 맛보는 새로운 나라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나라가 이땅에 임하기를 바라고 소망하면서 가진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새로운 공동체 (예수운동/예수공동체)에 참여하라는 예수의 초청이 오늘 본문의 중심된 주제다. 본문은 마가복음에서 발견되는 6개의 하나님 나라 어록중 하나다: (1)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삶의 결단, 즉 유혹에 끌려서는 안된다는 말씀과 (9:47);  (2)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씀과 (10:14, 15); (3)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요, 그리고 또한 둘째 계명이라고 대답하신 예수의 말씀에 동의한 “선한 서기관” 이 하나님나라에 가까이 간 사람이며 (12:34); (4) 마지막 마가복음의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이며, (14:25); 그리고 (5)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묘사한 부분이다 (15:42). 즉 본문을 포함한 마가복음에서의 하나님 나라 어록은 종말론적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 이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있는 주기도문에서도 발견된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고,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NRSV]).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미래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종말론적 기도문이라는 측면에서 예배가 끝날무렵 드리는 유대교의 카디시 기도문 (The Kaddish Prayer)과도 비슷하다. 예언자의 전승에서 볼 때, 하나님 나라는 가까운 미래에 다가오는 주님의 날 혹은 마지막 날을 의미한다 (이사야 13:6; 에스겔 30:3; 요엘 1:15).

결론적으로 마가복음이 이야기하는 하나님 나라는 영생과 동일시 될 수 없는 현세적이며, 변혁적이며, 혁신적인 새로운 세상에 대한 소망으로서, 예언자들의 메시지에서 발견되는 “주의 날”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남북한 성경비교: 민족화합을 지향하는 성서번역

남북한 성경비교

남한의 성경은 대한성서공회에서 출판한 개역개정, 개역한글, 표준새번역, 그리고 공동번역이 있다. 그럼 북한의 기독교인들은 어떤 번역본을 읽고 있을까? 얼마전 일리노이주 벌링턴 연합감리교회 (Burlington United Methodist Church)의 우경아 목사로부터 기독교대한감리회 서부연회에서 출판한「남북한 성경비교」(2006) 라는 제목의 책을 선물로 받고 그 의문점이 풀렸다. 북한의 기독교인들은 공동번역서를 읽고 있었던 것이다. 성서를 공부하는 필자로서는 귀한 선물이 아닐수 없다.       

감신대 구약학 교수인 왕대일 교수는 “공동번역 평양교정본에 대한 평가”라는 글에서 대한성서공회 민영진 박사의 제안에 따라 북한의 성경을 “공동번역 평양교정본”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현재 북한의 성경이 1977년에 대한성서공회에서 발간된 “공동번역 성서”에 기초한 북한식 한글표기법에 따른 북한식 공동번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기독교연맹 중앙위원회가 남한의 공동번역을 기초로 한 북한식 공동번역을 출판한 이유에 대해서는 왕대일 교수도 명확한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조선기독교연맹 중앙위원회가 공동번역서를 선택한 정확한 의도는 알수 없지만, 여러번역서 중 공동번역서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면에서 그 답을 조심스럽게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한성서공회는 공동번역서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신구교가 공동으로 성서를 번역하게 되었다는 것은, 20세기 후반기에 있어서 기독교인뿐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깊은 의미를 가진 큰 일이다. 이것은 신구교 학자들이 공동으로 인정할 수 있는 성서 원전의 성립과 바티칸 제2공의회 이래로 일어난 가톨릭교회 내의 변화가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으나, 크게 보면 신구교 지도자들이 하느님은 한 아버지시요 인류는 그의 한 자녀라고 하는 진리를 깊이 깨달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신구교가 연합하여 우리 말로 성서를 내놓게 된 것은 신구교 자체뿐 아니라 우리 민족 전체를 위하여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뜻깊은 일이다.   

공동번역 출판은 신구교가 연합하여 우리 말로 성서를 내놓은 역사적인 번역서로서 우리 민족 전체, 즉 남한과 북한의 기독교인들에게 아주 뜻깊은 일이다. 더불어 공동번역은 구약성서 학계의 권위자인 문익환 목사 (한국기독교장로회)와 작가인 이현주 목사 (기독교대한감리회)가 번역에 참여한 번역서다. 왕대일 교수는 북한기독교가 공동번역을 사용하는 것은 “교회와 교회, 교파와 교파가 하나가 되는 화해와 일치를 교회공동체의 기본 자세로 삼아야 된다는 진리를 간접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노력”이라고 평가하였다.

「남북한 성경비교」는 아래 창세기 1장 예문 페이지에서 볼수 있듯이 개역성경/공동번역성경/북한성경(성경전서)를 세 단으로 만들어 비교하여 볼 수 있도록 하였고, 성경전체가 아니라 일부분을 발췌하여 수록하였다.

제352회 시카고 성서연구학회

제352회 시카고 성서연구학회 모임 (Chicago Society of Biblical Research) 이 오늘 우리학교 Lutheran School of Theology at Chicago 에서 열렸다. 특별히 오늘 모임은 신약성서학 갈리디아서 수사학의 대가인 Hans Dieter Betz 의 학문을 기념하고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열렸다. 현재 시카고 지역에서 가르치고 계시는 Betz 교수님의 제자 두분이 Betz 교수님을 기념하는 찬사의 글을 올렸다: Clare K. Rothschild and Margaret M. Mitchell.

Meeting of Chicago Society of Biblical Research

세분의 학자가 논문을 발표하였다. 아래는 논문 요약문이다:

1. Revisiting the Judicial Species of Rhetoric for Galatians by Troy Martin (Xavier University)

 The primary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valuate an old suggestion by Cornelius a Lapide and Heinrich August Schott about the syntax of Galatians 1:6-7 that supports Hans Dieter Betz’s association of Galatians with forensic rhetoric. Rather than connecting εἰ μή in verse 7 to the preceding relative clauses as do all other commentators, they connect these two words to Θαυμάζω in verse 6. According to them, εἰ μή introduces a protasis for an apodosis that begins with Θαυμάζω. The resulting syntax indicates that Paul adopts the rehtorical strategy of “shifting of blame” in this attempt to persuade the Galatians to return to his gospel. Since shifting of blame is a recognized strategy in forensic rhetoric, their explanation of the syntax of Galatians 1:6-7 makes this part of the forensic species of rhetoric useful for understanding one aspect of Paul’s rhetorical strategy in Galatians.

2. The Depictions of Paul and Other Jews as Present and Former Persecutors in the Acts of the Apostles by James Kelhoffer (St. Louis University)

This paper examines persecution as a basis for legitimacy in the Acts of the Apostles. In particular it considers Luke’s negative depictions of Jews as persecutors and Luke’s characterization of Paul as the persecuted former persecutor.

3. The Cultic Status of the Levites in the Tmeple Scroll: Between hermenutics and History by Jeffrey Stackert (University of Chicago)

The complex views of Levitical cultic status in the Pentateuch continued to develop in Second Temple Jewish Literature. In several texts (e.g., Chronicles, the Testament of Levi, Aramaic Levi, Jubilees), the status of the Levites vis-à-vis the priests changes and even improves relative to their rank in pentateuchal Priestly literature. Perhaps no Second Temple text, however, is more noteworthy on the question of the relative status of priests and Levites than the Temple Scroll. By both mediating between biblical Priestly and Deuteronomic perspectives and innovating beyond them, this text introduces cultic privileges for the Levites unattested in other Second Temple literature. In this paper, I will attempt to explain the Temple Scroll authors’ exegetical engagement with their biblical sources as a basis for their novel presentation of Levitical cultuc rights. I will also consider the historical conditions that facilitate the legal innovations that the Temple Scroll introduces with regard to Levitical cultic status

코덱스 사이나이티크스 (Codex Sinaiticus) 학회

코덱스 사이나이크스

코덱스 사이나이티크스

가장 오래된 (4세기) 신약성서 사본인 코덱스 사이나이티크스 (Codex Sinaiticus) 에 대한 학회가 영국 박물관에서 2009년 7월 6-7일 사이에 열린다.

이 코덱스는 칠십인역 연구에도 상당히 중요하다. 이 코덱스의 칠십인역은 히브리 성서가 포함하지 않는 외경문서인 제2에스드라서 (2 Esdras), 토빗서 (Tobit), 쥬딧서 (Judith), 마카비 1서와 4서 (1 & 4 Maccabees), 그리고 지혜와 벤시락 (Wisdom and Sirach) 을 포함하고 있는 본문비평에 아주 중요한 코덱스다. 

코덱스 사이나이티쿠스 프로젝트 (The Codex Sinaiticus Project) 는 이 코덱스 전체를 디지탈 포멧으로 재 통합하는 작업 중이며, 이번 학회는 이 작업을 축하하는 학술학회로 모이게 된다. 이번 학회에 본문비평과 사해문서의 권위자인 임마누엘 토브 (Emanuel Tov)도 여러 강연자 중의 한분으로 참석한다. 자세한 사항은 Codex Sinaiticus Conference 를 참조하라. 특히 이 웹페이지는 현재까지 디지탈로 출판한 코덱스의 페이지를 제공하고 있다.

히브리어 성서 (BHS) 읽기 안내

히브리어 문법을 공부한 많은 사람들이 히브리어 성서(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BHS, 1977)를 읽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 이유는 히브리 성서(BHS)가 레닌그라드 코덱스(Leningrad Codex)에 기초한 본문 외에 맛소라 표기와 본문비평에 사용된 복잡한 기호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글은 (1) 히브리어 성서의 페이지 구성, (2) 맛소라 표기, 그리고 (3) 본문비평에 사용되는 기호를 설명함으로써 히브리어 성서를 읽고자 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자 한다. 이글은 엘리스 브론츠(Ellis R. Brotzman)의 『구약성서 본문비평 입문』(Old Testament Textual Criticism A Practical Introduction, 1994)과 폴 웨그너(Paul D. Wegner)의 『성서 본문비평』(Textual Criticism of the Bible, 2006)을 요약/정리한 것이다.

1. 페이지 구성

첫째, 히브리 성서(BHS)의 페이지 구성에 대해 살펴보자. 아래의 이미지는 히브리 성서(BHS)의 민수기 12:4-13:3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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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 히브리 성서 상단에 책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는데, 짝수 페이지 번호는 히브리어로, 홀수 페이지 번호는 라틴어로 각각 책의 제목이 기재되어 있다.
  • B: 히브리어 자음 ס(싸멕)은 패러그래프를 닫는다는 표시다.
  • C: 15번째와 19번째줄의 히브리어 자음 פ(페)는 패러그래프를 시작한다는 표시다. 고대문서에서는 새로운 줄이 여기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D: 오른쪽 여백은 맛소라 파르바다(Masorah parva; samll Masorah).
  • E: 히브리어 본문 바로 아래에 맛소라 매그나(Masorah magna; large Masorah)가 위치해 있다. 여기의 맛소라 매그나는 Cp12로 시작하는데, 그뜻은 민수기 12장에 대한 맛소라 매그나를 기입하였음을 의미한다.  
  • F: 맛소라 매그나 밑에 본문비평에 사용된 기호들을 포함한 본문비평 기호들이다. 본문비평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에세이 구약성서 본문비평을 참조하라.
  • G: 왼쪽 밑부분 여백에 히브리어 자음 ס(사멕)은 예전에 사용된 토라의 분할을 표시하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유대인은 토라를 167 부분으로 분할하였고, 바벨론 유대인은 54부분으로 분할하였다. 히브리어 자음 ס(사멕) 밑에 히브리어 פרשׁ 는 페라샤(Parashah, 주간 분할된 토라)가 이부분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지시하고 있다. 이 표시는 주간에 읽을 성서일과와 같은 것으로, 이 표시에 따라 매주 히브리 성서를 읽으면 1년에 토라를 다 읽게 된다.

2. 맛소라 표기

둘째, 맛소라 표기에 대해 살펴보자. 아래의 이미지는 히브리 성서(BHS)의 출애굽기 32:16-30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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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소라 표기에서 다음 두가지가 가장 중요하다: 케팁-케레(Kethiv-Qere)와 헤팩스 레고메논(hapax legomenon). 맛소라 표기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다음 두책을 참고하라: Reinhard Wonneberger, Understanding BHS: A Manual for the Users of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trans. Dwight R. Daniels, 2d ed. [Rome: Pontifical Biblical Institute Press, 1990]와 William R. Scott, A Simplified Guide to BHS [Berkeley: BIBAL, 1987]).

  • B: 위 예제 페이지의 오른쪽 여백 전체가 맛소라 파르바다. 모음이 없는 히브리어/아람어로 표시되어 있어 초보자가 이해하기에 쉽지 않다.
  • C: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맛소라 파르바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케팁-케레(Kethiv-Qere)다. C박스 안의 ק(콥프)는 아람어 분사 קְרֵא (Qere, “what is read”)로서 “읽혀진” 이라는 뜻이다 . 즉 본문에 적혀있는 히브리어 읽기를 전통에 따라 맛소라가 교정한 것이다. 읽기를 교정해야 할 단어는 같은 줄의 히브리어/아람어 단어 위에 조그만 점을 쳐서 표시하였다. 이경우에는 맛소라 파르바가  מִיָּדָו  로 적혀있지만, מידיו로 읽어야 한다고 표시하였다. 대부분의 케팁-케레는 히브리어나 아람어의 다양한 철자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24절: 맛소라 파르바의 또다른 중요한 것은 헤팩스 레고메논(hapax legomenon)다. 위의  예제 페이지의 경우 24절 끝에 맛소라가 히브리어 자음 ל 위에 작음 점이 찍어서 표시하였고, 해당 단어 위에 작음 점이 찍어 표시하였다. 즉 두 단어는 히브리어 성서에서 이 구절에만 나온다는 뜻이다.    

3. 본문비평에 사용되는 기호

세째, 히브리어 성서(BHS)에 포함된 본문비평에 대해 살펴보자. 히브리어 성서 아랫부분에 본문비평시 사용되는 기호들을 보여준다. 히브리 성서(BHS)의 기초가 된 코덱 레닌그라덴시스가 아니라 다른 고대사본이나 번역본에서 다른 본문읽기를 할 경우 본문비평한다. 즉 다른 사본이나 번역본에서 삭제되었거나 첨가된 본문읽기를 비교/대조한 본문비평의 실예를 보여주고 있다. 본문비평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에세이 구약성서 본문비평을 참조하라. 아래의 이미지는 히브리 성서(BHS)의 창세기 1장 부분이다. sample-page-genesis

본문 비평란의 Cp는 해당 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위의 경우 Cp. 1,1은 창세기 1장 1절에 대한 본문비평 기호임을 지시한다. 위의 예제는 창세기 1장 7절이다. 

  • “7a-a”: 본문비평을 하고자 하는 부분의 시작과 끝을 의미한다.
  • Cf 6a: 6절과 비교하라는 뜻이다.
  • ins: 편집자는 7절의 a-a부분에 6절과 비교하여 וירא אלהים כי־טוב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라는 절을 첨가할 것을 제안한다.
  • cf: 4절, 10절, 12절, 18절, 21절, 31절과 비교하라.
  • et: “그리고” 라는 뜻으로 칠십인역의 8절을 참조하라는 뜻이다.

본문비평을 하기 위해서는 위의 예제와 같이 비평에 사용된 기호들과 사본/번역본 생략어를 알아야 한다. 비평에 사용된 언어와 기호, 그리고 사본 생략어를 통틀어 textual apparatus라고 한다. 혹자는 textual appratus를 본문 비평장치라고 한국어로 번역하는데, 이는 적절한 표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본문비평이 기구나 장비를 사용하는 어떤 기술이 아니기 때문에 본문 비평장치라는 한글번역은 부적절하다. 따라서 필자는 본문 비평장치라는 한글번역 대신 본문 비평기호라고 부른다. 본문비평에 사용된 사본/번역본의 생략어는 다음과 같다:

  

히브리 성서(BHS)의 머리말과 본문비평에 사용된 기호는 한동구 교수에 의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비블리아 헤브라이카 슈투트가르텐시아」의 서문. BHQ는 민영진 교수에 의해 번역된 BHQ의 서문, 부호와 약자, 용어 정의와 해설 번역(대한성서공회의 성경원문 연구)을 참고하라.

히브리어 성서(BHS) 읽기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아래의 책들을 참고하라.

  1. Albright, William F. “New Light on Early Recensions of the Hebrew Bible.” BASOR 140 (1955): 27-33.
  2. Barr, James. “A New Look at Kethibh-Qere.” OTS 21 (1981): 19-37.
  3. Blau, Ludwig. “The Extraordinary Points in the Pentateuch.” JQR 19 (1907): 411-19.
  4. Cross, Frank M. “The Contributions of the Qumran Discoveries to the Study of the Biblical Text.” IEJ 16 (1966): 81-95. Reprinted in QHBT. See pp. 278-92.
  5.            . “The Evolution of a Theory of Local Texts.” In QHBT. See pp. 306-20.
  6. Dotan, Aron. “Massorah.” EJ 16:1401-82.
  7. Freedman, David N. “The Massoretic Text and the Qumran Scrolls: A Study in Orthography.” Textus 2 (1962): 87-102. Reprinted in QHBT. See pp. 196-211.
  8. Ginsburg, Christian D. Introduction to the Massoretico-Critical Edition of the Hebrew Bible. Repr. New York: KTAV, 1966. See pp. 9-107, 183-96, 308-67.
  9. Sperber, Alexander. “Problems of the Masora.” HUCA 17 (1942-43): 293-394.
  10. Talmon, Shemaryahu. “Aspects of the Textual Transmission of the Bible in the Light of the Qumran Manuscripts.” Textus 4 (1964): 95-132. Reprinted in QHBT. See pp. 226-63.
  11. Tov, Emanuel. “A Modern Textual Outlook Based on the Qumran Scrolls.” HUCA 53 (1982): 11-27.
  12. Waltke, Bruce K. “The Textual Criticism of the Old Testament.” In Biblical Criticism: Historical, Literary, and Textual, edited by Roland K. Harrison et al. Grand Rapids: Zondervan, 1978. See pp. 47-65.
  13. Wonneberger, Reinhard. Understanding BHS: A Manual for the Users of the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Rome: Biblical Institute Press, 1984. See esp. pp. 61-73.
  14. Würthwein, Ernst. The Text of the Old Testament: An Introduction to the Biblia Hebraica, translated by Erroll F. Rhodes. Grand Rapids: Eerdmans, 1979. See esp. pp. 17-20.

시편 41편 3절

 יְהוָה יִסְעָדֶנּוּ עַל־עֶרֶשׂ דְּוָי כָּל־מִשְׁכָּבוֹ הָפַכְתָּ בְחָלְיוֹ׃

 NRSV: The LORD sustains them on their sickbed; in their illness you heal all their infirmities.

 개역개정: 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을 고쳐 주시나이다.

표준새번역: 주께서는, 그가 어떤 에 걸리든지 붙들어 주시니, 어떤 병상이라도 떨치고 일어난다.

공동번역: 병상에서 그를 붙들어주시리니 자리를 떨쳐 일어나게 되리라.

시편 41편 3절은 “병자의 침대”(דוי ערש)라는 단어와 ”[병자가] 눕는 침상”(משכבו)이라는 단어가 각각 앞절과 뒷절에서 아름다운 대구를 이루고 있는 평행시다. 

위의 번역에서 보듯이 영문번역 NRSV와 두 한글번역서는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히브리시의 평행구조를 잘 드러내고 있는 반면, 공동번역은 [병자가] 눕는 침상 혹은 병상을 “자리”라는 단어로 번역하고 있다. 비록 공동번역의 번역이 표면적으로 대구법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오히려 다른 한글번역보다 더욱 시다운 번역을 하고 있다. 즉 독자는 이미 “자리”라는 한글단어가 ”병상”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병상”이라고 단어를 단순 반복하는 것보다 “자리”라는 새로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더욱 시다운 이미지를 살린 좋은 번역일 수도 있다.

앞절과 뒷절의 동사시제도 흥미롭다. 앞절의 시제는 미완료 시제다(Imperfect/prefix): “주님이 붙들어 주신다”(יסעדנו). 그리고 뒷절은 완료형 시제다(perfect/affix): ”당신께서 완전히 고쳐 주신다” (הפכת). 앞절의 미완료형 동사는 종종 3인칭 명령형으로(jussive) 이해될 수 있지만, 뒤절의 시제에 맞추어 완료형으로 해석하는게 더 적절하다. 뒤절의 완료형은 어떤 병이라도 고쳐주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앞절의 동사의 형태가 조금 이상하다. 동사 끝부분에 히브리어 자음 하나가 삽입되었다: “눈” (Nun, נ). 따라서 동사의 형태는 다음과 같다: יסעדנו. 이런 현상을 문법적으로 어중 문자삽입 (energic or epenthetic [inserted] Nun)이라고 부른다. 이는 아랍어의 영향으로 문법적으로 아무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단지 발음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 (Joüon §61, [A Grammar of Biblical Hebrew]).

시편연구의 권위자 모빙켈은 시편 41편의 장르를 ”개인 탄원시”(individual lament)로서 ”병상에서 읇는 시”(a pslm of illness)로 정의하였다(Mowinckel, The Psalms in Israel’s Worship, II, 1-9). 그러나 병상에서 읇는 탄원시라는 모빙켈의 정의는 문자적이다. 시편 41편 3절은 1절과 3절의 문맥에서 이해해야 한다(시편 41:1-3). 1-3절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이해하고 돌보는 사람은 어떤 재앙이나 병중에도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말하면, “행복” 또는 “회복”은 가난하고 약한 사람을 돌보는데서 온다는 심오한 진리를 말하고 있다 (제임스 림브거 [James Limburg], Psalms, 137). 시편 41편은 영광의 찬양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주님, 찬양을 받으십시오. 영원에서 영원까지. 아멘. 아멘,” 시편 41:13) 시편의 다섯책 중 첫번째 책을 끝맺는 마지막 시다. 첫번째 책의 시작은 ”복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으로 시작하여 (시편 1편), “복있는 사람은 가난하고 약한 (과부나 고아) 사람을 돕는 사람으로 모든 시련과 병사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으로 끝맺는다 (시편 41편).

민중과 과정: 민중신학과 과정신학의 대화

민중신학자 김희헌(Hiheon Kim)에 의해 민중신학에 대한 새 책이 (영문) 출판되었습니다: Minjung and Process: Minjung Theology in a Dialogue with Process Thought [민중과 과정: 민중신학과 과정신학의 대화], New York: Peter Lang Publishing Group, 2009). 출판사가 소개하는 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This book reconstructs the legacy of Korean minjung theology by reformulating its essential ideas in a dialogue with process thought. In a minimal sense, this study is a theological reinterpretation of the doctrine of the minjung messiah, an idea which historically suffered from a misunderstanding that minjung theology created a ‘messianic confusion’ while replacing christology and soteriology by a radical anthropology. This erroneous conception occurred when the idea was placed within the philosophically dualistic framework of traditional doctrines in which the work of minjung is totally separated from the work of Christ. In order to avoid such a dualistic understanding, the author critically adopts process panentheism and makes minjung ideas more communicable and more comprehensive in current theological, religious, and philosophical debates. Beyond defending the idea of the minjung messiah, he also argues for an inclusive minjung hermeneutics that promotes the fundamental insight of minjung theology, in philosophical clarity. Through minjung hermeneutics, minjung theology expands its practical concern and overcomes the theoretical nihilism in postmodern studies.

책을 읽어 보지 않아서 책의 주제와 내용을 알수 없지만, 위의 내용에 따르면, 이책은 민중 메시아론을 과정철학/신학과의 대화로 재 구성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기독론과 구원론이 인간론으로 대치된 민중신학의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이러한 민중신학의 문제점은 “민중의 역할” (the work of minjung )과 “그리스도의 역할” (the work of Christ)을 철저히 구분하는 철학적 이분법에 기초하였다고 주장합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저자는 과정철학/신학의 방법론으로 민중 메시아론을 다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 책은 또 다른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민중신학이 “포괄적 민중해석학” (inclusive minjung hermeneutics)으로 포스트모던 허무주의를 극복하여 민중신학의 근본적인 통찰력을 더욱 증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민중신학의 핵심은 “민중 메시아론” 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민중신학자들의 민중 메시아론은 대체로 명확하지 않거나 또는 이론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이책은 민중신학의 민중 메시아론의 문제점을 과정신학의 해석적 틀 안에서 해결하고자 하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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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Table of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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